라이스를 읽다
채 하루가 못 되는 짧은 일정으로 라이스가 한국을 찾았다.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볶듯 바쁜 걸음이다. 중국 가는 길에 잠깐 들렀을 수 있겠으나, 여기 저기 기사를 살펴보면 그래도 꽤 다급한 용건이 있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독도와 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참 속상해 있는 우리 면전에 대고 미국은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지지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 만해도 그렇다. 눈썰미가 없어도 한참 없다. 오만한 제국 출신이라 자신이 방문할 집 형편이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 걸까?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말고 미국이 이끄는 ‘미래지향적 삼각체제’에
한겨레의 자살보도
‘변하지 않는다.’ 미디어 비평가들이 자주 확인하는 언론 현실이다. ‘객관적’ 근거를 가진 것이든 단순한 ‘인상’ 비판이든, 비평가들의 지적은 언론 현장에서 좀처럼 반영되지 않는다. 보도내용 분석과 비판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 그 때문이다. 좀 지났지만, 영화배우 이은주씨의 사망에 대한 보도는 그 전형적인 예처럼 보였다. 급격히 늘어나는 한국의 자살률의 곡선을 꺾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자살예방협회는 2004년 7월 언론의 자살 보도 기준을 발표한 바 있다. 자살은 전염되며, 그 중요한 매개체가…
왕가위 기자
왕우의 에 환호했던 이들을 이후의 홍콩 무협 영화 앞에 세우면 침묵 일색이다. 같은 홍콩산 무협영화인 앞에선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하기 일쑤다. 두 팔을 가진 멀쩡한 무사가 악함을 앞에 두고도 미동조차 않음엔 분노까지 드러낸다. 한 팔의 무사가 기꺼이 내뽑던 검을 아끼고 있음에 이르면 답답함을 느끼며 스크린을 뒤로 하며 퇴장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왕가위의 은 그의 매니아들에게도 안절부절함을 선사했다는 소문이다. 외팔이 무사가 권선징악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면 에 등장한 멀쩡하지만 무심한 무사들은 현실 속에서 규준을 찾지 못하는 지금의…
‘한류’ 이면의 ‘寒流’
가 있다. 에가와 타쓰야라는 일본 만화가의 작품으로, 발행되는 즉시 국내에 번역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총 12편이 나왔다. 평소 만화를 즐겨 읽는 문화연구자로서 책은 가히 충격적이다. 매 권마다 긴장을 놓지 못한다.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직접 읽어 보길 권한다. 책은 ‘일본 작가의 시각에서 그려진 작품’ 그 이상이다. 집단기억, 역사 재구성의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는 일본 근현대사의 전쟁 경험을 새롭게 영웅적으로 조명하는 문화적 텍스트다. 타자의 삶과 타지의 역사까지 자신의 시선에 따라 재구성코자
생선 가게에서 배우는 지혜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에 제법 장사가 잘 되는 생선 가게가 있었다. 이 가게는 팔다 남은 생선을 버린다고 했다. 친지나 이웃에게 나누어 줘도 손해 볼 것 없고 인심도 얻을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을 돈 주고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선에 대한 수요가 무한대로 늘 수 없다고 보면, 공짜로 나누어 주는 만큼 수요가 줄어들 것이다.한국 신문은 다르다. 힘들게 생산한 물건을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남에게 헐값에 넘기고 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그 ‘남’이 자신의 경쟁자라는 사실
역사적 사건과 언론
요즘의 한국 언론을 읽다 보면 마치 무슨 한국 근대 역사책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든다. 연초에는 1965년 한일 외교 관계 수립 당시 관련 정부 문서가 공개되어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정황,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떠한 자세로 회담에 임했고 일제 피해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점이 자세히 드러나는 귀중한 자료였다. 언론으로서는 물론 이러한 중요한 자료에 대해 보도하고 분석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1975년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에 대한 문서 공개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일
포털 저널리즘에 시비를 걸어야 한다
인터넷 포털 서비스에 실리는 기사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종이 신문에 비길 일이 아니다. 온라인 저널리즘이라 일컬어지는 인터넷 신문도 거기엔 미치지 못한다. 특히 포털 서비스의 초기 화면에 뜨는 기사들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다. 저급하거나 함량 미달이라고 미뤄두었던 저널리즘적 눈길을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포털 저널리즘으로 명명하고 그것의 영향력, 사회적 책임, 타 저널리즘과의 관계 설정 등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되었다.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무임승차격의 몸집 부풀리기를 거듭해온 그에게 더 늦기 전에 시비를 걸어야 한다. 애초 포
기자사회의 갱신
폴 비릴리오의 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이 프랑스 이론가는 ‘지구 전체 규모의 시각’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쉽게 볼 수 없었던 것들을 가시화시켜주는 시각에 힘입어 원격 감시가 24시간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감시의 시각은 이제 공간적으로 크게 확산되어 전지구적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미시적으로 인간의 몸을 철저히 가상화한다. 텔레비전 등 매체를 통해 작동하는 가상적 시각이 대체 지평선 너머 끊임없이 확장된다. 인간의 내부, 개인의 육체를 표적으로 삼는 지독한 호기심과 탐욕스러운 눈길에 대해 사회는 철저히 무력하다.
아노미에 빠진 미디어 정책
미디어 영역의 행위 주체들이 아노미에 빠진 것 같다. 뒤르깽에 따르면 아노미(a-nomie)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norm)들이 유효성을 잃은 상황을 말한다. 사회공동체는 구성원의 욕구 조정을 통해 안정적 욕구 충족을 보장한다. 규범은 개인의 욕구를 일정 수준에서 제한한다. 그러나 경제 위기나 호황 등으로 그 한계가 모호해지면, 사회 전반에서 일탈행위가 늘어난다. 이것이 뒤르깽이 설명하는 아노미적 자살의 사회적 원인이다.규범 체제는 기존의 권력구조를 반영하며, 인간의 자의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를 억압한다. 그러나 규범은 동시에
한국은 ‘뉴스 강대국’이다
외신기자로 서울에서 활동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한국에는 뉴스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에 걸쳐서 한국은 뉴스가 넘쳐난다. 주변의 일본이나 중국처럼 경제, 정치 대국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 못지 않게 세계 관심의 표적이 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지난 몇 년간 최소한 뉴스 생산량에 있어서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에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뉴스에 있어 한국은 아시아의 강대국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도대체 한국에서는 왜 그다지도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또 이런 사건들은 세계의 관심
언론재단 이사장 선출 논란 유감
내 마음 속 2004년 ‘언론 10대 뉴스’. 그 중에서 제 1순위 뉴스를 뽑으라면 ‘종이 신문의 위기’를 톱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으리라. 감원, 파산, 명예퇴직, 이직, 감봉, 폐쇄…. 첫 번째로 손꼽을 만큼의 정황은 무수히 많다. 모두가 어렵게 살아온 한 해였지만 신문 언저리의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한 해를 지내왔다. 언론계 전반이 내년엔 더 고통을 받을 거라지만 어느 누가 신문만큼이나 찬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을까 싶다. 누구도 이처럼 눈 깜짝할 새에 신문산업이 한파에 내몰리리라 예측하진 못했다. 인터넷 신문의 약진을 부러운…
망년의 소회
또 한 해를 보낸다. 어머니 지구, 가이아의 저주가 본격화되었는지 말도 안 되게 따스한 기온이 시즌 마감을 방해하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은 여지없다. 2004년 한국사회, 기억하고픈 사건도 있지만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나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 더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뭐니 해도 노 정권에 대한 탄핵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다음주 신문사들이 내놓을 올해 ‘십대뉴스’에 탄핵은 분명 톱으로 뽑힐 것이다. 새로운 피가 아무리 수혈되어도 한국사회에 정치는 성립하기 어려움을 여지없이 보여준 비극적 사건이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IMF에 버
미디어에 의한 정치의 식민화
미디어에 의한 정치의 식민화. 독일 정치학자 토마스 마이어가 쓴 책 ‘미디어크라시’(Mediokratie)의 부제다. 정치가 식민화되어 미디어에게 그 ‘주권’을 내 주었다는 것은 정치가 미디어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한국의 경우 아직 정치의 식민화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치에서 미디어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 선거였다고 평가되는 17대 총선에서 이른바 ‘감성의 정치’가 힘을 얻은 것이나, 국회 활동에서 상징 싸움과 폭로성 발언의 비중이 커지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방증들이다.기능이 확대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영화 흐름을 칭하는 말이다. 아직 적절한 한국이름이 없어 아쉬운 표정들이긴 하지만 영화 이론가들은 그에 대해 제법 두터운 논의들을 펼쳐왔다. 이 범주 안에 영화이론가들은 ‘파이란’ ‘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아름다운 시절’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동감’ ‘시월애’ ‘
‘9·23테러’와 섹스 쿠데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지 이제 두 달이 된다. 9월 23일 직전까지만 해도 신문들은 여성인권, 성윤리 보호라는 측면에서 이 법에 별 이의가 없어 보였다. 중앙일보는 “성매매특별법 시행이 우리의 수치스러운 성매매 풍토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 한다”는 사설을 내놓았다.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은 ‘성인남녀가 상호 동의 하에 성을 매매하면 합법적인 상업거래로 봐야 한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사설을 인용하면서 “한국신문이 이런 논조로 사설을 썼다가는 여성단체의 몰매를 맞을 각오를 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