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죽지 않으며 죽을수도 없어"... 천관우는 살아있다

[다시보는 언론계 역사·인물·사건, J스토리]
⑦ '3개 신문 편집국장' 언론인 천관우

  • 페이스북
  • 트위치
천관우(1925~1991) 선생은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다. 6척(약 180cm) 큰 키에 100kg 몸집의 우람한 거구였다. 체구만이 아니라 학식이며 의식, 정신이 담대했다. 대주가였으며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다. 그와 함께 일한 후배들은 한국 언론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평가한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후석(後石) 천관우(千寬宇·1925~1991)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식과 강연회가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행사는 천관우 선생을 기리고 언론인, 역사학자,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죽음 뒤에 삶이 있는 분들, 우리 속에 살아 있는 분들 가운데 한 분으로 늘 기억한다”고 했다. 천 선생의 딸 천문주 여사는 “아버님을 이렇게 기억해주신 것에 감사하다. 아버님이 평생을 바친 한국사 연구, 민주주의 수호 정신을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식과 강연회가 열렸다.

천관우는 1925년 8월10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갔다가 해방과 동시에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청년 시절에 해방을 경험했던 세대였다.


천관우는 경성제대 예과 재학 중에 예과 학생회가 발행한 ‘경성대학 예과신문’을 편집했다. 1946년 3월6일에 창간한 이 신문은 타블로이드 2면으로 열흘에 한 번씩 나왔다. 대학 시절에 신문과 인연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천관우는 1949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논문으로 ‘반계 유형원 연구-실학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한 단면’을 썼다. 실학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맥을 짚는 논문이었다. 논문을 지도한 이병도는 “실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군계일학 같은 업적”이라고 칭찬했다.

1977년 서울 불광동 천관우 선생 댁에서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과 함께.

한국전쟁이 바꾼 운명, 기자의 길

천관우는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고 했으나 한국전쟁을 겪고 진로를 바꾼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친구의 연줄로 1951년 대한통신 기자가 됐다. 밥벌이 방편이었다. 사무실 2층 합숙소에서 지내며 외신 번역을 맡았다. 이듬해 유네스코 기금을 받아 미국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6개월간 공부했다. 전쟁 중에 미국 대학에서 연수를 받은 첫 번째 언론인이었다.


천관우는 한국일보, 민국일보, 서울일일신문을 거쳐 1963년 1월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발탁됐다. 38세였다. 언론계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조선일보·민국일보·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고 한국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었으며 서울일일신문과 동아일보의 주필을 지냈다.


그는 ‘육십자서(六十自敍)’에서 “40이 거의 다 될 때까지도 한군데 진득이 붙어 있지를 못하고 이 신문에서 저 신문, 마음 내키는 대로 전전했다. 신문사가 대개는 자리를 잡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이런 유랑벽이 일부 젊은 신문인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고 했다.


다른 신문사에서 대개 1년 미만씩이거나 조선일보에서 2년 9개월 동안 재직한 것과 달리 천관우는 동아일보에서 6년을 근무했다. 편집국장 3년, 주필 3년을 맡으면서 언론인 생활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가 재임한 1960년대 동아일보는 권력과의 대담한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 최고의 신문이었다. 천관우가 동아일보에 영입된 그 무렵,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가 군정을 거쳐 그해 1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천관우는 1964년 8월 한국기자협회 결성으로 이어진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8월10일 500여명의 신문·방송·통신 등 언론사 대표들이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발의된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는데, 천관우가 이 선언문의 문안을 기초했다.

1966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남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온 천관우(오른쪽)는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 1968년 신동아 필화 사태로 두 사람은 격돌한다.

‘신동아 필화’로 동아일보 쑥대밭

1965년 12월 주필 겸 이사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던 천관우는 1968년 말 ‘신동아 필화사건’에 연루돼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 신동아는 그해 12월호에 특집으로 ‘차관’이란 제목의 심층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김진배·박창래 기자는 집권 여당이 차관 배정 대가로 재벌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황을 파헤쳤다.


이 기사가 나가고 동아일보는 쑥대밭이 됐다. 두 기자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이틀 넘게 밤샘 심문을 받았다. 신동아 부장 손세일을 비롯해 기자들이 불려갔고, 신동아 주간 홍승면에게 출두를 요구했다. 천관우는 11월29일자 2면에 통단짜리 장문의 사설로 중앙정보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문제의 기사가 벌을 받을 일이 아니라 상을 받을 일이라고 옹호하며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다루는 것은 부당하며, 적용 법규도 반공법 위반 혐의가 될 수 없다고 직격했다.


천관우가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을 박아 정면으로 치고 나오자 중정은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북괴와 중소분열’ 번역 논문을 트집 잡아 수사를 확대했다. 동아일보 발행인 겸 부사장 김상만과 천관우를 연행해 심문하고, 사흘 뒤 홍승면과 손세일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장성원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은밀하게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다”며 “정부 당국이 세칭 ‘신동아 필화 사건’을 만든 것은 개헌을 추진하는데 최대 장애물이 동아일보이고 그 핵심 인물이 천관우라고 판단하고 천관우를 미리 제거하려는 작전이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을 해임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동아일보의 완전한 굴복이었다.


기자 2명이 구속되고 동아일보 발행인과 주필 등 12명이 중정에 불려간 사건을 주요 매체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편집인협회장 최석채(조선일보 주필)는 천관우 등 3명이 신동아 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난 현실에 책임을 지고 편협 회장직을 사퇴했다. 천관우는 동아일보를 떠난 직후인 1969년 1월10일자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신동아 사태를 외면하고 침묵한 언론계 행태를 ‘연탄가스 중독’에 비유했다. 천관우의 글은 언론계에 공감을 불러왔다. 권력에 침묵하는 언론 현실에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고 젊은 기자들은 “언론은 죽지 않으며 또 죽을 수도 없다”던 천관우의 글에 용기를 얻었다.


1년 넘게 언론계를 떠났던 천관우는 1970년 2월 동아일보에 복귀했다. 사사(社史) 편찬을 담당하는 이사였다. 편집이나 논설에 아무런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근무처도 옥상에 옥탑방처럼 붙은 좁은 방이었다.

천관우가 남긴 유품. 베레모, 파이프, 안경.

‘민수협’ 참여로 민주화운동 중심에 등장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을 벌인 7대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1971년 4월19일 재야인사들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했다. 민수협 발족식에서 발표한 ‘민주수호선언과 결의문’은 천관우가 작성했으며, 민수협의 성명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재야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천관우가 등장한 것이다. 당국은 천관우와 동아일보에 압력을 가했고, 그해 12월 천관우는 이사직을 사임해야 했다.


1972년 10월 국회 해산과 더불어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위한 ‘유신체제’가 들어섰다. 이듬해 10~11월 대학가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자 천관우 등 15인이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부영은 천관우가 쓴 시국 관련 선언문 초안을 들고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유진오 등 재야인사들을 찾아다녔다고 회고했다. 천관우는 1973년 12월 ‘유신헌법 개정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이듬해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로 추대되며 유신 철폐 대열에 섰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1970년대 초반, 이 나라 재야민주화운동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 천관우였다”고 했다.


천관우는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1975년 3월17일 새벽 150여명이 동아일보에서 강제 축출됐을 때 현장에 있었고, 동아투위 결성 기념식 때마다 참석해 해직기자들을 격려했다. 해마다 정초에는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이 불광동 천관우의 20평 남짓한 집을 찾아왔고, 기자들은 대주가인 천관우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마시다 대취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동아투위는 1978년 3월에 천관우의 집에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동조단식을 벌였다. 아무 수입도 없이 칩거하며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던 천관우는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 얼마나 궁핍했던지 천관우는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신가야사’를 연재할 때 마감 날짜보다 이르게 원고를 가져와 원고료 지불을 요청했다. 시골의 상사(喪事)에 다녀와야 하는데 부조금이 없어 원고료 청구를 했던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천관우를 편집국장으로 모시고,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문학과지성사를 운영하던 김병익은 “그분의 물질적인 가난함까지 충분히 짐작되어 거구의 뒷모습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천관우는 1970년대 후반 칩거하면서 한국사, 특히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사학계 학회지 등에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고 ‘한국사의 재발견’ ‘한국상고사의 쟁점’, ‘고조선사·삼한사 연구’, ‘근세조선사 연구’ 등을 연이어 내놓았다.

천관우는 1970년대 후반 칩거하면서 한국사, 특히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펴낸 한국사 관련 저서들.

수군거림, 그리고 쓸쓸한 말년

천관우는 1981년 3월 한국일보 고문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그 사이 10·26으로 박정희가 피살되고 ‘서울의 봄’도 잠시,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18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전두환은 그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대통령 보궐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은 개헌을 단행해 이듬해 2월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1년 5월 천관우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초대 의장에 추대됐다. 천관우가 신군부 정권에 협력했다는 수군거림이 퍼졌다.

그는 동아일보와 인터뷰(1981년 5월18일자)에서 “장기집권의 폐단을 지적하고 민주화를 요구한 체제비판이라는 입장과 통일운동에 앞장서려는 현재의 입장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협조와 비판을 가려서 행해왔으며 저항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맡았다고 말했을 뿐, 신군부 정권과 협력하게 됐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불광동 그의 집을 찾던 민주화운동 동료들, 그를 따르던 기자들은 등을 돌렸다. “전두환 정권에 가담한 것 아니냐” “변절한 것 아니냐”는 뒷말들이 따라 다녔다. 그는 1985년 환갑을 맞아 사학계 후배들로부터 기념논총을 봉총받은 직후 폐암이 발병해 병마와 싸우다 1991년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년이 얼마나 쓸쓸했던지 천관우의 부인 고 최정옥 여사는 2004년 8월 기자협회보와 인터뷰에서 “전두환과 독대를 하고 ‘7년 단임’을 꼭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입을 다문 것인데, 사람들은 ‘천관우가 돈 받았다’고 오해했다”며 “남편은 사람들이 뒤에 쉽게 이야기한 것처럼 암이나 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주위의 ‘비난화살’에 괴로워하다 죽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천관우 선생 추모문집간행위원회가 선생의 20주기를 맞아 2011년 10월 출간한 ‘거인 천관우: 우리 시대의 언관 사관(言官 史官)’(일조각)을 참고했습니다.


김성후 선임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