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 참혹함 알린 '불멸의 시'… 검열 뚫고 전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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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시인 김준태의 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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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정문 근처 두 칸 셋방에 살던 김준태 시인이 문순태 전남매일신문 편집부국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1980년 6월2일 아침이었다.


“김준태 선생, 나 문순태요.”
“문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오늘 12일 만에 신문을 내기로 했는데, 기사를 제대로 실을 수 없네. 두 시간 줄 테니까 광주 시민들의 아픔을 시로 쓸 수 있겠나?”
“아…. 써보겠습니다.”

광주시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된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 최종 편집본(왼쪽). 계엄사 검열로 김준태 시인의 시 곳곳에 빨간펜으로 쓴 ‘삭(삭제의 준말)’, ‘보류’ 표시가 보인다. 오른쪽은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 계엄사 검열로 3분의 2가 잘린 시가 1단으로 실렸고, 제목에서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삭제됐다. /광주전남언론인회 제공

1969년 <시인>지에 시 ‘참깨를 털면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한 김 시인은 당시 전남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문 부국장의 연락을 받은 그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시상을 구상한 것도 잠시,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원고지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귀신 들린 듯 시구는 줄줄 흘러내렸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기자들 제작거부로 12일 만에 속간

김준태 시인이 시에 영혼을 불어넣고 있을 때, 전남매일신문 편집국은 비장한 각오로 신문 제작에 임하고 있었다. 신문 발행이 중단된 지 12일 만이었다. 계엄군이 5·18과 관련한 보도를 일체 불허하자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5월20일 집단 사표를 내며 5월21일부터 6월1일까지 신문 제작을 거부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 5. 20.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전남매일신문 사장 귀하.”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시민군들에게 총을 난사하며 전남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했다. 항쟁이 끝나자 문화공보부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으면 폐간하겠다고 압박했다. 폐간을 피하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월2일자부터 신문을 발행해야 했다.


하지만 계엄당국은 자체기사는 일절 쓸 수 없고 통신기사로 제작하도록 보도지침을 내렸다. 그날 아침 편집국 회의가 열렸다. 젊은 기자들은 5·18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폐간되더라도 신문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문순태 부국장과 김원욱 사회부장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광주의 진실을 전달하려면 신문을 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진통 끝에 신문은 8면 발행이 아닌 4면으로 줄여 제작하기로 했다.


“창간한다는 마음으로 신문을 발행하자고 했어요. 기사로 진실을 전할 수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광주의 진실을 전달하자. 1면은 광주의 아픔과 슬픔을 대변하는 시로, 3면은 광주의 표정으로 담담하게 채우자고 설득하니 기자들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부국장이던 문순태 소설가의 증언이다.


당시 전남매일신문은 낮 12시에 발행하는 석간신문이었다. 마감에 맞추려면 시간이 없어 다들 바삐 움직여야 했다. 문 부국장은 송수권 시인을 떠올렸다. 항쟁 기간 도청 앞에서 만난 송 시인은 잠을 잘 수가 없어 시를 한 편 썼다고 말했다. 송 시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바로 김준태 시인한테 전화했고 그는 군말 없이 쓰겠다고 했다.

신들린 듯 써 내려간 ‘아아 광주여…’

김준태 시인은 230행에 이르는 시를 1시간여 만에 썼다. 단어 하나, 토씨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접신(接神)이라고 하죠. 남도에선 신들렸다고 합니다. 나도 그 시를 어떻게 썼는지 몰라요. 내 몸속에 5월에 죽은 억울한 영령들이 들어와 썼다고 생각합니다.” 김 시인은 시 창작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김 시인은 원고를 챙겨 들고 택시를 잡아탔다. 충장로 1가 근처에서 내려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으로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 문 부국장에게 시를 전달했다. 시를 읽어본 편집국 간부들은 신문 게재 이후 사태를 우려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신문사에 어떤 탄압이 들어올지 불 보듯 뻔했다. 주저하고 있을 때 김원욱 사회부장이 시 게재를 밀어붙였다.


“그날 오전 편집국 전체회의 전에 심상우 사장이 날 부르더군요. ‘우리 신문은 내 개인 소유가 아니다. 신문사 문 내려도 좋으니 소신껏 제작하라’. 사장의 그 말을 편집국장을 비롯해 기자들에게 못했어요. 사장이 맘대로 제작하라고 전했다가는 불을 지를 것 같았어요.” 당시 상황을 김원욱 전 광주매일신문 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1면 편집자인 윤유석 기자는 시를 받아 편집을 시작했다. 윤 기자는 광주의 상징, 무등산이 나오는 광주 전경 사진을 위에 깔고 그 아래 시 전문을 두 단에 걸쳐 실었다. 시 제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시커먼 컷으로 뽑고 본문이 크게 보이도록 활자를 키웠다.(검열에 걸려 본문 활자는 원래대로 조정됐다)


1980년 당시 모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다. 전남도청 별관 2층에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1981년 1월24일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보도검열관실’이 있었다. 공식 명칭은 ‘계엄사령부 전남북계엄분소 보도 검열단’이었는데, 보도검열관실로 통칭했다. 검열관실에는 장교 3~4명과 보안대 파견 상사가 상주하면서 광주전남지역 신문·방송·잡지 모든 기사를 검열했다.


김 시인의 시는 보안대 상사의 검열에 3분의 2가 뭉텅 잘렸다. 두 단에 걸쳐 게재된 시는 한 단으로 줄었고, 제목에서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삭제되고 검은 공백만 남겨졌다.


김 시인의 시가 잘리는 현장을 눈앞에서 본 기자가 있었다. 전남매일신문과 경쟁하던 전남일보 나의갑 기자였다. 그는 6월2일 낮 12시쯤, 검열을 받기 위해 대교지(신문 한 면을 조판한 뒤에 교정지와 대조하기 위해 찍어낸 신문지 크기의 종이)를 들고 보도검열관실에 들어섰다.

광주의 비극적 참상을 한 줄도 쓸 수 없었던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사표를 제출하고 제작을 거부했다.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광주 시내에 뿌린 사표 문구. /박화강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시 삭제를 보다 못한 경쟁지 기자가 나섰다

보안대 박기정 상사가 전남매일신문 1면을 검열하고 있었다. 박 상사는 빨간펜으로 김 시인의 시를 쫙쫙 그어가며 ‘삭’, ‘보류’라고 썼다. ‘삭’은 삭제를 의미했다. 보다 못한 나 기자가 말했다.


“예 말이요, 시 읽을 줄 아십니까? 그렇게 마구잡이로 잘라내면 한 줄도 안 남겠는데요. 검열관실에서 시를 다 들어내면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화가 나 빈칸을 메우지 않은 채 신문을 발행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검열 잘못했다고 혼날 것 같은데요.” 박 상사는 나 기자의 한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시를 계속 잘라냈다.


나 기자는 검열관실에서 시가 실린 전남매일신문 1면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시를 보니 뭔가 탁 들어왔어요. 우리도 시로 5·18을 표현했어야 하는데…. 1단짜리 기사라도 물 먹으면 밥을 못 먹게 할 정도로 두 신문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 시가 잘려 나가는 걸 볼 순 없었죠.”


검열이 광주의 진실을 막을 순 없었다. 보안대 상사가 검열하는 동안 삭제되지 않은 시 전문이 밖으로 뿌려졌다. 문선공들(편집국에서 원고가 오면 서가(書架) 모양의 선반들 사이를 오가면서 필요한 활자들을 찾아내어 판을 짜서 전체 면을 조판하는 사람들)이 시 전문을 등사기로 밀어 찍은 인쇄물을 누군가 뿌렸다.


“한 행도 삭제하지 않은 시를 공무국에 넘겼어요. 문선공들이 원본 그대로 인쇄해서 계속 그걸 찍어냈더라고요. 등사기로 밀어서 찍은 거 있잖아요. 그걸 계속 찍어서 뿌렸는데, 시민들이 그걸 보려고 구름떼처럼 몰려왔어요. 신문 나오기 전에 뿌린 거죠.” 문순태 소설가의 증언이다.


김 시인의 시는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하버드대 데이비드 맥캔 교수가 영문으로 번역해 AP, UPI, 로이터에 보내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시를 비롯해 곳곳이 잘려 나간 6월2일자 4면짜리 전남매일신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신문을 사려는 시민들의 줄이 계속 이어졌고, 전국에서 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늦은 밤까지 윤전기를 돌려야 했다.


한 달 가까이 도망을 다닌 김 시인은 보안대에 끌려가 시달리다가 전남고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그해 8월 문순태·김원욱·박화강·윤유석·손정연 등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대거 해고됐고, 전남매일신문은 언론사 통폐합으로 폐간됐다.


김준태 시인은 매년 5월이면 광주 시내 곳곳을 찾아다닌다. 80년 5월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진 곳이다. 그는 그 자리에 장미꽃과 백합꽃을 놓으며 오월 영령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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