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외입양 10년 추적… 탐사·다큐로 국가에 질문하다

[김성후의 The Journalist] (9) 김동형 AP통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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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종로구 연합미디어센터 13층 AP통신 사무실에서 김동형 기자가 수년에 걸쳐 취재한 한국의 해외 입양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해외 입양 시스템이 한국의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아주는 작업이었는지, 아니면 서양의 부모들에게 한국의 아이를 찾아주는 작업이었는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성후 선임기자

김동형 AP통신 기자는 한국 아이들 20만명이 해외로 보내진 입양 문제를 수년에 걸쳐 추적했다. 입양인 80명 이상과 입양 부모, 입양기관 직원, 정부 관계자 인터뷰와 정보공개청구로 얻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 더미는 끈질긴 취재의 단면이었다. 그는 뉴욕 본사 클레어 갈로파로 기자, 미국 공영방송 PBS 시사프로그램 ‘프론트라인’ 제작진과 협업해 한국의 해외 입양 시스템을 파헤친 장문의 탐사보도 시리즈와 9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내놨다.


AP통신과 PBS 프론트라인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 입양의 정산(South Korea’s Adoption Reckoning)’은 올 상반기 미국 해외기자클럽상 등 각종 저널리즘 시상식에서 수상하고 에미상 탐사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 “김동형 기자가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6월 뉴욕에서 열린 오스본 엘리엇 아시아 저널리즘 우수상 시상식에서 갈로파로 기자는 말했다.


1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율곡로 연합미디어센터 13층 AP통신 사무실. 김 기자는 비 내리는 창밖을 등지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냉철한 민완 기자로 보였는데, 실제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동료의 호평만으로도 해외 입양 취재에 대한 그의 진심은 전해졌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토록 몰두했을까.

2023년 7월 김동형 기자가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입양인 김유리씨를 취재하고 있다. 김씨는 11살 때 프랑스로 입양됐다. /김동형 제공

2014년 연말 시작한 해외 입양 취재

그가 해외 입양을 마주한 것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연말쯤, 형제복지원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 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에서 해외 입양이 있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옷을 입혀 사진을 찍고 나면 얼마후에 그 아이들이 싹 사라진다거나 형제복지원에 기부한 외국인들에게 감사 편지를 쓴 다음에 유아들이 있던 소대에서 아이들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해외 입양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던 그에게 형제복지원이라는 공간에서 해외 입양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형제복지원은 말이 부랑인 시설이었지, 부랑인이라는 느슨한 규정을 이용해 사실상 누구나 잡아 가둘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장애인과 노숙자, 단지 운이 나빴던 행인부터 길을 잃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와 가족도 모르게 몇 년 동안 강제노동과 극심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끔찍한 공간에서 어린아이들이 해외 입양을 갔다면 원가족과의 분리가 한 단계 더 생기는 것 아닌가? 단절이 영원해지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이건 내가 입증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써야 할 기사’라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실태를 취재하면서 동시에 해외 입양이 일어났는지 확인했다. 여기저기서 해외 입양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보건사회부 통계를 접하고 ‘쇼킹’했다. 70년간 20만명이 해외로 입양됐고, 특히 1980년대 초중반에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매년 7000~8000명에서 많을 땐 9000명에 달했다.


“그 통계를 보니 제 질문이 형제복지원을 벗어나더군요. 이 아이들이 누구인데 수천 명씩 나갔나. 한국전쟁 이후 구호 프로그램으로 시작해서 70~80년대도 이어졌겠거니 했는데 80년대 초중반에 왜 해외 입양이 폭증했을까. 당시는 서울올림픽 준비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주목받고 있던 때였잖아요.”


자료를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알아갈수록 70년간 20만명을 해외로 보낸 거대 입양 프로그램이 설명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국가적 패러다임이 작동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해외 입양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에 만난 전직 입양기관 직원과의 대화는 해외 입양 취재에 전환점이었다.


2015년 6월 초, 김 기자가 기차역에서 내려 잡아탄 택시는 산속으로 달렸다. 전직 입양기관 직원이 전해준 동료 언니 얘기를 듣고 그분을 꼭 만나고 싶었다. 1980년대 입양이 폭증하면서 입양기관에 아이들 자료가 쌓여갔다. 사무실을 계속 늘릴 수 없던 입양기관들은 필수적인 자료만 두고 나머지 자료들을 내다 버리려고 했다. 그 자료들을 못 버리게 하면서 “당신들은 이 아이들이 커서 돌아올 거라고 상상하지 못하냐”고 말했던 분이었다.


택시를 타고 1시간 이상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어렵게 찾아갔는데 그분은 한마디도 못 해주고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택시를 불렀으니 오면 타고 돌아가라고 했다. 난감했다. 읍내에서 택시가 오려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게 다행이랄까. 그 시간 동안 멀리서 왔다며 그분이 내온 딸기와 요구르트를 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마나 입양 압박을 받았는지, 아이를 키우기 힘든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자식들이 어떻게 입양 시스템으로 빨려 들어갔는지, 입양기관들이 병원에서 직접 아이를 인수하는 사례 등을 얘기하던 그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더니 “김 기자, 인구 조절 정책이 뭔지 알죠?”라고 했다.

“김 기자, 인구 조절 정책 알아요?”

수십 년간 입양에 종사한 분이 해외 입양을 출산 이후에 국가가 개입한 인구 조절 정책으로 설명하는 건 충격이었다. 국가가 미혼모 아동, 빈곤 가정 아동, 한부모 가정 아동, 시설 아동에 대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아이들을 해외에 아웃소싱하고 서구 나라들의 아동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이 입양아의 공급처가 된 것 아니냐는 인식에 닿았다. “그분과의 대화가 오래 남았어요. 해외 입양에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형제복지원 취재 당시 그의 초기 목표는 인권 침해와 국가 책임, 해외 입양이 있었음을 한 덩어리로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제복지원이 해외 입양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활동가 도움을 받아 해외 입양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한국 입양기관과 협력하는 미국 기관들에 질의를 넣었는데 형제복지원을 모르거나 입양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기사가 계속 미뤄지니 마음이 좀 급하더군요. 일단 형제복지원의 전반적인 인권 침해와 국가 책임에 집중하는 기사를 내자고 회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2016년 4월21일 ‘AP: 한국 정부, ‘부랑자’ 집단 학대, 살해 은폐’(AP: S.Korea Covered up mass abuse, killing of ‘Vagrants’)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10여명 인터뷰와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정부 자료를 분석해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권 학대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널리 퍼져 있었으며 △국가가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고 정부 고위층의 조직적인 은폐로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 수천 명이 보상은커녕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11쪽에 달하는 탐사보도의 반향은 컸다. 그가 쓴 어떤 기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미국, 유럽 등 해외 독자들의 반응이 이메일과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쏟아졌다. 해외 미디어 매체들의 인터뷰 요청도 이어졌다. 국내 언론이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일가의 폭력과 부정부패에 초점을 맞췄다면 AP 기사는 국가 책임을 부각하며 형제복지원 사건이 한국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에 집중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독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소프트 파워가 강해서 그런지 독재도 ‘소프트’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외국인들도 많죠. 그런 외국인들에게 형제복지원 사건은 독재 정부가 시민들의 삶을 얼마나 세세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통제, 개입, 억압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라 당시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형제복지원 수용 아동들이 해외 입양됐다는 기사는 3년 후에 나왔다. 피해자 증언으로만 제기된 형제복지원의 아동 해외 입양을 처음으로 확인한 단독 기사(AP Exclusive: Abusive S Korean facility exported children-2019년 11월9일)였다. 김 기자는 국회의원과 정부 관계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통해 형제복지원이 1979년부터 1989년 사이에 아동 19명을 해외에 입양 보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했고, 또 최소 51명 이상을 해외에 입양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간접적 증거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형제복지원 대책위가 형제복지원 후신인 느헤미야 재단이 운영하던 ‘실로암의 집’을 방문해 찾은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보자”

10년 전, 형제복지원에서 시작한 해외 입양 취재는 “깜깜한 거리를 더듬어가는 느낌”이었다. 입양 정책에 관여한 고위 공무원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는데 사망했거나 취재에 응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인터뷰를 자료로 메꿔야 했는데, 어디에 무슨 자료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보자.” 헌책방을 뒤지고 국가기록원이나 국회도서관에 가서 있는 자료, 없는 자료를 다 끌어모았다.


입양인 커뮤니티를 통해 입양인들을 소개받고, 세계한인입양인협회(IKAA)가 매년 주최하는 세계한인입양인대회를 취재하고, 입양기관 행사에 다니고, 전직 입양기관 관계자들을 두드렸다. 그 무렵 만난 해외 입양 연구자 신필식 박사의 열정을 잊을 수 없다. 입양인들은 자신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하면서 그에게 자료를 기꺼이 건넸다.


기자들의 취재가 그렇듯 특정 사안만 붙들고 있기 어렵다. 일상적인 취재를 하며 짬짬이 해외 입양 보도를 냈는데, 관련 취재에 속도가 붙은 것은 2023년 여름이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뉴욕 본사에 한국의 해외 입양에 대한 심층기사를 제안하며 탐사보도 에디터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코로나19 등으로 미뤄지다 마침내 취재 허락이 떨어졌다. 입양 아동을 받는 수령국들의 책임을 취재할 기자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받아들여 탐사보도팀 클레어 갈로파로 기자를 합류시켰다.


갈로파로 기자는 미국에서 입양 문제를 취재했고, 평창동계올림픽 취재팀으로 와서 함께 일한 경험도 있어 그에게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서구 국가의 수요와 책임을 언급하지 않고는 입양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갈로파로의 합류로 그 부분에 대한 취재가 가능해졌다.


김 기자와 갈로파로 기자가 공동 취재에 나설 무렵, PBS 시사프로그램 ‘프론트라인’과 다큐멘터리 공동 제작이 결정됐다. 지난해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마리우폴에서의 20일(20 Days in Mariupol)’도 AP통신과 PBS 프론트라인이 협업한 작품인데, 두 회사가 다큐멘터리 공동 작업을 가끔 한다고 한다.


2023년 6월부터 협업이 시작됐다. 김 기자와 갈로파로 기자는 역할을 나눠 취재에 나섰고, 다큐팀은 그들의 취재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작업에 돌입했다. 텍스트와 영상이 전달하는 부분이 서로 달라 논쟁도 있었지만, 다큐에 필요한 영상을 찍다가 추가 취재도 하는 유기적인 관계가 됐다. 다큐팀이 한국으로 와서 촬영하고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렇게 1년 3개월이 지난 2024년 9월 결과물이 나왔다.


AP통신은 한국의 해외 입양 시스템을 조명한 ‘AP 조사 결과, 대규모 입양 사기로 한국 아이들이 가족과 이별하게 됐다’(Widespread adoption fraud separated generations of Korean children from their families, AP finds) 등 탐사보도 3편을 비롯해 여러 편의 기사를 내고 PBS 프론트라인은 다큐멘터리 ‘South Korea’s Adoption Reckoning’을 TV와 온라인을 통해 방송했다.


그는 보도가 나간 뒤 수백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도 받고 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도 있었지만, 평생 버려진 아이로 생각했다거나 한국에 찾아야 할 가족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등 대부분 안타까운 사연들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여러 세대에 걸쳐 이뤄진 입양 시스템이 입양인들을 ‘버림받은 존재’로 평생 살아가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AP통신 탐사보도팀 클레어 갈로파로 기자(사진 왼쪽)와 김동형 기자가 지난해 5월 미국 오리건주 유진에 있는 홀트인터내셔널을 방문해 관계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영어로 쓰는 업에 머무는 이유

김동형 기자는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공부하다 첫 시험을 치른 코리아헤럴드에 합격한 게 2002년 3월이었다. 영어로 타이핑도 못 치는데 잘할 수 있을까 망설였다. ‘코리아헤럴드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스포츠부를 만든다더라’, ‘네가 가면 역사적인 월드컵도 취재하고 수습이지만 기사 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언론고시반 선배들의 말이 그럴듯했다. 그 또한 기자가 되면 제일 하고 싶었던 분야가 스포츠라 코리아헤럴드로 출근했다.


막상 입사하니 내근이었다. 1년 넘게 편집부에 있으면서 기자 생활에 적응해갔다. 그 무렵 그를 사로잡은 건 신문이 인쇄되는 윤전실이었다. 굉음을 내는 윤전기에서 신문이 나오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았다. 해외 연수나 유학 경험이 없는 그는 선배들 기사나 외신을 보며 영어로 기사 쓰기를 배웠다. 자기 시간을 따로 내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선배들이 큰 힘이 됐다. 2~3년 정도 지나니 ‘역피라미드식’ 구성의 기사를 어려움 없이 쓸 수 있었다.


“영어로 기사 쓰다 보면 약간 해방감 같은 게 있어요.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인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하니까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맥락을 담고 드라이하게 표현하되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어요. 예민한 주제의 경우엔 대중적 정서라든지 민족주의적 감성을 벗어나 좀 담담하게 쓸 수 있는 해방감이 있어요. 그래서 계속 영어로 쓰는 업에 머물고 있나 봐요.”


영어로 기사를 20년 넘게 쓴 그는 지금도 영어를 끊임없이 공부한다고 했다. 과거 한때는 자신감을 가졌는데, 요새는 한계를 느껴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중이라고. 다큐멘터리 내래이션을 하면서 발음 교정을 하느라 새벽까지 재녹음하며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떤 단어는 발음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감독한테 스크립트를 바꾸자고 했다고 그는 웃었다.


2014년 9월 AP통신으로 이직해 11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 외신 기자의 하루는 오전 6시 조선중앙통신이나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 체크에서 시작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요한 얘기를 하면 기사화하고 그날 취재 계획이나 목표에 따라 움직인다. 요즘 문화 쪽 기사나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관한 기사 주문이 늘어 아이템에 대한 유연성을 고민하고 있다. 북한, 정치, 재벌 등 외신이 좋아하는 주제들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에 관해 다양한 기사를 써보라는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본업이 ‘소박한 기록자’라고 했다. “저널리즘이 세상을 바꾼다는 식의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조금이나마 비추는 작은 거울이었으면 좋겠다. 소박한 기록자를 본업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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