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 속 강원도' 재발굴… "장소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죠"

[김성후의 The Journalist] (5) 오석기 강원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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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기 강원일보 기자는 편집·문화·교육 데스크 업무에 더해 간혹 데일리 기사를 쓰면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각각 ‘그림 속 강원도’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를 연재하고 있다. /오석기 제공

문화콘텐츠가 변주한 강원도의 다양한 얼굴에 주목한 이유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보고 나서다. ‘옥자’의 중요한 배경이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일대라는 사실을 알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강원도의 풍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내 기록하면 어떨까.’


우연히 찾아온 영감은 영화에서 시작해 문화의 갈래를 따라 확장됐다. 각각의 장르마다 강원도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이 다르고 등장한 장소의 층위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든 게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강원도라는 지역이 가진 이야기의 힘이었다. ‘○○ 속 강원도’를 열쇳말로 문화콘텐츠에 등장하는 강원도의 서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영화 속 강원도’로 시작한 기획 시리즈는 5년 넘게 드라마, 가요, 소설,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15일 강원도 춘천에서 만난 오석기 강원일보 기자는 “문화콘텐츠 안에서 강원도가 어떤 정체성을 띠며 자리하는지 살펴보고 싶었다”면서 “장소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자 서사가 깃드는 기반”이라고 했다.

올해 3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그림 속 강원도’ 1편. 박수근 화백의 ‘겨울풍경’을 다뤘다.


‘영화 속 강원도’(2020년 1월~9월), ‘드라마 속 강원도’(2021년 3월~11월), ‘가요 속 강원도’(2021년 11월~2022년 9월)는 강원도의 문학 지도를 새롭게 그린 ‘소설 속 강원도’로 확장됐다. 2022년 9월30일자 강원일보 지면에 등장한 ‘소설 속 강원도’는 김도연의 장편소설 ‘마가리 극장’이 열었다. 평창 출신 김도연은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감각적이라서 그가 늘 주목하던 작가였다.


“영월 모운동이라는 마을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졌거든요. 한때 석탄산업의 호황으로 1만명이 북적이고, 서울과 동시에 최신 영화를 개봉한 가설극장이 있던 곳이죠. 그 자체로 이미 영화 같고 소설 같은 공간인데, 모운동이 문학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독자에게 어떤 정서로 다가가는지 보여주기에 ‘마가리 극장’ 만큼 좋은 첫 작품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는 이 연재를 통해 강원도가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이야기의 공간으로 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시리즈는 햇수로 2년5개월 동안 이어졌다. 주 1회 연재라는 게 말이 쉽지, 매주 한 편의 소설을 온전히 감당해내야 한다. 주말 밤이나 새벽에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 ‘지금 뭐 하고 있냐’는 생각이 슬그머니 찾아오고, 마감할 때마다 ‘이번 주는 그냥 쉴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은 건 소설이 그린 어떤 장소였다. 이름도 낯선 강원도 산골 마을이 소설 속에서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졌을 때 ‘이 이야기를 꼭 소개하고 싶다’는 책임감 같은 게 들었다. 기자로서의 시간, 강원도에서 살아온 시간, 또 문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시간이 매주 지면 위에 축적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이기곤 했다고 털어놨다.

2022년 9월부터 주 1회 강원일보에 실린 ‘소설 속 강원도’ 시리즈는 102회, 햇수로 2년5개월 이어졌다.

‘소설 속 강원도’를 2년5개월 연재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강원도라는 장소가 품고 있는 서사의 힘이죠.” 산업화의 파도에 흔들렸던 탄광마을, 분단의 상처가 남아 있는 접경지대, 사라진 읍내 극장과 옛 기차역 등이 문학 속에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 따라가다 보면 강원도는 한국 사회의 굵직한 서사들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


처음엔 강원도가 등장하는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업은 지역 정체성과 문화 자산을 다시 매만지고 복원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이번 주는 우리 동네가 나오네요”, “이 소설 읽어보고 싶어요”, “그 작가 책 사러 갔어요”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기사를 쓰는 손끝이 덜 외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장소의 서사성과 사람들의 기억,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독자들이 ‘소설 속 강원도’ 연재를 가능하게 했어요. 저는 그걸 매주 조금씩 꺼내어 지면에 옮겨 적은 사람일 뿐이죠. 매주가 마감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 소중해서 도중에 그만두기가 더 조심스러웠어요.”


소설을 읽어도 배경이 강원도인지, 스토리에 강원도가 나오는지 알기 어렵다. 그는 연재를 진행하며 나름의 ‘탐색 루틴’이 생겼다고 했다. 서점 신간코너를 들락날락하며 지역명이 표지나 띠지에 있는지 살피고, 신문사로 보내오는 홍보용 서적을 하나하나 들춰보고, 인터넷에 서 ‘특정 지역명+소설’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고…. 나중엔 어딜 가든 소설을 뒤지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습관이 무섭다고 연재를 끝낸 지금도 소설책이 보이면 책장을 뒤적인다. 그러다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찾으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 요거 한번 쓰면 좋은데.”


‘소설 속 강원도’ 시리즈는 2월28일 102회로 마무리됐다. 200자 원고지 6~7매 분량의 글쓰기였지만 소설 한 편을 꼼꼼히 읽고, 등장하는 장소가 가진 역사적·지리적 맥락을 따져보고, 작가의식까지 짚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는 연재가 100회를 넘어서자 이제는 놓아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친구와 농구를 하러 가지 않았다면…

오석기 기자는 올해로 26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기자를 업으로 삼고 살아왔지만, 처음엔 언론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교수를 꿈꾸며 취업보다는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외환위기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던 시절이었다. 대학원을 준비하던 그에게 형이 물었다. “취업에 자신이 없어 대학원 가려는 거냐. 정말로 공부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형의 질문을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2020년 4월 고 김시철 시인(사진 왼쪽)과 가진 인터뷰 장면. /오석기 제공

운명은 우연히 찾아왔다. 1999년 6월 어느 날, 그는 친구와 농구를 하러 가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강원일보에 다니던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강원일보에서 수습기자를 뽑는데 원서 넣어보라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아유, 저는 아직 대학원 끝나지도 않았어요. 여기 제 친구 있는데 한번 해보라 그럴게요.”


그렇게 강원일보에 원서를 넣었고, 면접에서 죽을 썼는데 덜컥 합격했다. 1999년 7월이었다. 수습 교육을 마치고 첫 발령을 받은 부서는 인터넷팀이었다. 대학 다닐 때 홈페이지도 척척 만들던 그는 인터넷팀에 자원해 8년을 일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와 온라인 뉴스의 가능성을 실험하다가 2008년 문화부로 자리를 옮겨 17년째 문화 관련 기사를 다루고 있다.


중간에 미디어부와 사회부를 1~2년씩 거쳤지만, 그의 기자 DNA에는 강원도 문화가 깊게 박혀 있다. “문화부 기자로 오래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원도 문화예술계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됐고, 그 안에서 지역 문화가 얼마나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17년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이 스며들면서 그는 지역 예술가의 시선과 문장에 주목하고, 지역성과 문화의 접점을 들여다보는 취재에 집중했다. ‘○○ 속 강원도’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했고, 더 앞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 제자리 찾기’ 취재에 닿았다.

오대산본 실록·의궤 제자리 찾기 12년 보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에 사고(史庫)를 만들어 왕실 주요 서적을 분산 보관했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무단 반출됐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상당수 소실됐다가 일부가 2006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왔다. 오대산사고본 의궤는 1922년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으로 반출됐다가 2011년에 환수됐다.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는 국내로 환수된 이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됐는데, 본래의 자리인 오대산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지역의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2011년 8월 정계·학계·종교계·언론계·여성계·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조선왕조실록 및 왕실의궤 제자리 찾기 범도민 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오대산사고본 제자리 찾기 운동이 본격화했다.


오 기자에게 이 사안은 단순한 문화재 보도를 넘어 지역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매년 관련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크고 작은 기사를 통해 소식을 전하면서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로 돌아옴)’, ‘기억의 장소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조적으로 접근해 꾸준히 보도했다.


그는 실록과 의궤가 2023년 오대산에 돌아오자 ‘110년 만의 귀향’ 기획 시리즈를 냈다. 이와 별도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 시리즈를 2년 넘게 연재하고 있다. 강원일보 출신 언론인 모임 ‘강일언론인회’는 12년에 걸친 장기 보도로 실록과 의궤의 환지본처를 이뤄냈다며 오 기자에게 ‘2023 올해의 기자상’을 수여했다. 강원특별자치도에서 감사패, 월정사에서 공로패도 받았다.


“장기 보도는 기자 개인의 의지만으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신문사의 조직적 지지에 더해 지역사회의 관심이 따라 줬기에 가능했죠. 저는 문화재 소재나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유물을 둘러싼 장소와 공동체가 그 ‘기억’을 감당하고 재구성해 가는가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오대산사고본 문화재는 국가의 기록 정신과 지역의 문화 자산이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기자로서 그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는 2023년 11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개관과 함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1913년 실록이 일제에 반출된 지 110년 만의 귀향이었다. 현재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75책, 환수된 의궤는 82책이 전해진다.

2022년 2월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사진 오른쪽)씨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석기 제공

“기억을 기록하는 기자로 남고 싶어”

그는 ‘○○ 속 강원도’ 연작으로 3월부터 ‘그림 속 강원도’를 연재하고 있다. 그림은 사람들의 기억과 상상, 감성에 남아 있는 강원도 풍경을 더욱 감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 소설 다음으로 선택했단다. 박수근 화백의 ‘겨울풍경’으로 시작한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 독자와 만나고 있다. 그림이 끝나면? 수필, 성악 등 강원도와 연관 있는 다른 문화콘텐츠로 이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소설 속 강원도’ 시즌 2도.


그는 ‘소설 속 강원도’ 연재물을 재가공해 문학기행 안내서를 준비하고 있다. 강원도 지역언론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다. 102편 중 20여편을 골라 연재에 담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고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넣어 문학에 기행을 결합한 책을 10월쯤 펴낼 예정이다. “연재를 통해 발견한 강원도의 문학적 장소들이 넓은 독자층과 공유되고, 궁극적으로 지역관광 자원으로 연결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오석기 강원일보 기자가 5월17일 강원도 동해시 동해꿈빛마루도서관 3층 강당에서 ‘소설 속 강원도-지역성과 문학적 가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오석기 제공


우연에 우연이 쌓여 강원일보에 들어왔고, 어쩌다 26년이 흘렀다. 2.5매짜리 서평 기사 쓰느라 일주일을 낑낑대던 초보 기자는 지금은 편집부와 문화·교육분야를 다루는 편집문화교육담당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 시절 홈페이지 제작에 빠질 정도로 디지털 기술에 친숙한 탓인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관심이 많다. 챗GPT, 제미나이, 퍼플렉시티 등 생성형 AI를 활용해 기사를 쓰고 올해만 생성형 AI 교육을 대여섯 차례 찾아 들었다.


그는 “기억을 기록하는 사람,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눈앞의 사건을 보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고 ‘잊힐 뻔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이야기를 조용히 꺼내어 세상과 연결해주는 기록자이자 통역자 같은 기자이고 싶어요. 지역이라는 공간에 스며든 기억과 문화, 사람의 이야기를 꾸준히 발굴하고 전하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훗날 누군가 ‘오석기’ 이름 석 자를 떠올린다면? “이 사람은 강원도의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참 오랫동안 들여다봤던 기자였지…. 그걸로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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