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로 긴박했던 밤, 계엄군 헬기가 국회에 내리던 현장을 취재하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체포된 현직 대통령을 사진으로 포착한 기자가 있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계엄 선포 소식을 듣고 내달렸고, 인도로 올라가라는 경호처 요원 요구에 응하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직업병 중에 하나가요. 퇴근한 지금도 휴대전화 배터리 잔량이 96%에요. 언제 어디에 갈지 모르니까요….” 11일 만난 도준석 서울신문 기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현장은 예고 없이 다가오기에 카메라가 없으면 휴대전화라도 꺼내서 찍어야 하는 게 사진기자의 숙명이다.
계엄군 헬기 보고 운동장으로 뛰어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의 밤도 그랬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을 무렵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그는 회사에 연락해 카메라를 부탁하고 곧장 국회로 달려갔다. 방패를 든 경찰이 보좌진과 시민들의 국회 진입을 막으면서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틈을 뚫고 국회 경내로 들어간 그는 휴대전화로 충돌 모습을 취재했다. 그때 국회 상공에 진입한 계엄군의 헬기가 눈에 들어왔다.
헬기가 내릴 곳은 국회 운동장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헬기가 향하는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계엄군이 국회 본관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으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때 ‘형님’(취재 차량 운전기사)과 연락이 닿아 카메라를 넘겨받았다.
헬기는 계속해서 날아왔고, 국회 운동장에 무장한 계엄군을 토해냈다.(김민기 국회 사무총장은 12월4일 기자회견에서 국방부가 전날 밤 11시48분부터 4일 새벽 1시18분까지 헬기로 24차례에 걸쳐 무장한 계엄군 230여명을 국회 경내로 진입시켰고, 0시40분에는 계엄군 50여명이 추가로 국회 외곽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고 밝혔다.) 계엄군과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한 앵글에 담기 위해 포인트를 찾아야 했다. 운동장 건너편 국회 외곽 담장 아래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국회 건물을 배경으로 헬기에서 내리는 계엄군이 카메라 파인더에 잡혔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마감이 촉박해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열었는데, 국회 담장 밖에 있는 경찰 2명이 그를 가리켰다. 곧이어 그중 1명이 담벼락 돌기둥을 밟고 넘어오고 있었다. 사진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노트북을 접고 카메라 장비를 챙겨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100m쯤 걸어 국회 5문 옆 화장실에 들어갔다.
두려움에 얼마나 목이 탔던지 화장실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곧장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노트북 전원을 연결할 콘센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노트북 배터리는 사진을 보내고 남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데스크와 짧게 통화하고 화장실 바닥에서 사진 전송을 시작했다. 마지막 사진까지 보내니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날 밤 취재진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죽을 수도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계엄군이 본회의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 다 잡아갈 줄 알았다고. 국회의장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죠.” 그는 국회로 오는 택시 안에서 기사분한테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사진기자가 죽었다는 기사를 접하면 저인 줄 알아달라는 말이 목까지 넘어왔는데 삼켰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 계엄은 잔인했기에 총 맞을 각오를 하고 취재했어요.”
기자 ‘짬밥’이 잡은 대통령 체포 사진
현직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체포·구금된 1월15일, 도 기자는 경기도 과천시 정부과천청사에 있었다. 내란 우두머리·직권남용으로 체포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로 압송됐다.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43일 만이었다.
체포영장 집행이 새벽으로 예고된 탓에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생방송을 틀었다. 공수처와 경찰이 1·2차 저지선을 돌파하고 오전 8시10분쯤 관저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집을 나섰다. 공수처에서 야근하라는 데스크 지시를 받고 서둘러 공수처 청사로 향했다. 대통령 지지자들 집회로 정문을 폐쇄한 탓에 법무부 쪽을 통해 공수처 청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오전 10시53분쯤 대통령을 태운 경호처 차량(캐딜락 에스컬레이드)은 포토라인을 피해 공수처 청사 후문으로 들어갔다. 가림막이 설치된 곳에 내린 대통령은 취재진과 마주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는 현장풀(pool·공동취재)에 참여했다.
오후 7시쯤 대통령이 9시 전에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진기자들은 풀단 약속대로 청사 후문 주차장 정면과 대통령 차량이 나올 것으로 예측되는 지점으로 나눠 대기했다. 그를 포함해 대부분 사진기자들은 청사 후문 오른편에 자리 잡았다. 그는 카메라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며 ISO를 5000까지 올리고 초점은 수동으로 설정했다. 오토 포커스(Auto Focus)는 야간에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 내부의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밤 9시40분쯤 경호처 요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원들은 철망 펜스 앞에 대기하며 경호처 차량을 주시하던 기자들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10여 미터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인도로 올라가라고 했다. 기자들은 대부분 인도로 올라갔으나 그는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차도에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기다렸다. 머지않아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로 출발하는 차량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에 취재진의 플래시가 터졌고 그도 셔터를 눌렀다.
기자들은 일제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봤다. 모두 5컷이었는데 초점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의 얼굴과 두 눈이 잘 보였다. 그가 찍은 사진은 그날 오전 이종근 한겨레 선임기자가 공수처 건물로 들어가는 대통령의 옆 모습을 포착한 사진과 함께 초유의 대통령 체포 장면을 찍은 역사적 사진이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춰 찍은 것은 사진기자 ‘짬밥’에서 나온 경험이었다. “정치인 등 유명인사의 차량은 짙게 썬탠이 돼 있고, 얼굴을 가리려고 햇빛가리개를 내리거든요. 또 스트로보(플래시)가 카메라 위쪽에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리 잘 찍더라도 햇빛가리개의 그림자가 생겨 주요인물의 얼굴이 까맣게 보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최대한 낮게 찍어야 얼굴이 제대로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는 운이 따랐다고 했지만 준비되지 않았다면 잡지 못했을 사진이었다.
아버지 선물과 최민식 작가 사진집
‘니콘 FM.’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다 준 수동 카메라다. 그는 이 카메라를 소풍 갈 때나 수학여행에 갖고 다니며 사진과 가까워졌다. 그렇게 사진학과를 선택했고, 대학 시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씨 사진집을 접한 뒤 보도사진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최 작가의 흑백사진에 담긴 서민들의 모습, 특히 바나나 속살은 그대로 두고 껍질에 붙은 걸 맛있게 먹던 아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 끌렸다.
그는 1999년 6월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입사 1년이 안 된 2000년 5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 은신하던 한 인물을 포착했다.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이었다. 당시 린다 김은 김영삼 정부 시절 백두사업 등 방위력 증강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군·정·관계 고위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의혹과 함께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과 주고받은 일련의 연서(戀書)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언론들은 린다 김의 행방을 추적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을 찾아냈고 그 집 앞에 진을 쳤다. 밤낮없이 취재가 이어졌지만 린다 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던 린다 김은 5월6일자 대부분 신문 1면 사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속 그녀는 창문 틈 사이에서 오른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도 기자는 전날 밤 옆집 베란다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다가 단독으로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로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특종 사진으로 제32회 한국기자상, 제37회 한국보도사진전 대상, 제5회 삼성언론상, 제5회 한국언론대상을 휩쓸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양해를 구하고 옆집 베란다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면 찍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특히 두 선배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 분은 ‘출발이 좋다’고 하셨고, 다른 한 분은 ‘김흥국 되지 말라’고 했어요. 가수 김흥국은 히트곡이 ‘호랑나비’밖에 없잖아요. 린다 김 사진 한 장으로 언론사 생활 끝내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말씀이었죠.” 그는 현장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건이 터지면 현장으로 달려가는 게 사진기자예요. 현장에 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직업이죠.”
27년차 기자의 잊지 못할 현장, 세월호
그는 사진기자로 27년을 살면서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각종 사건·사고 현장을 경험했다. 특별히 세월호 참사가 잊히지 않는다. 구명조끼는 입었지만, 몸이 굳은 채 차가운 바다에서 수습된 학생들의 시신…. 왜 생때같은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는지 지금도 불면에 시달린다. 취재 트라우마로 신경 정신과 상담도 받았다고 했다.
2003년엔 이라크 전쟁을 취재했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3주 넘게 오가며 이라크 전쟁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미군 무기 행렬을 찍다가 쿠웨이트 경찰에 잡혀 메모리카드를 뺏길 뻔했고, 한 번은 장갑차 위에 있던 영국군이 자신을 총구로 겨누는 모습에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까 이제는 많은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 볼 수 있게 되더군요.”
기자로 살다 보면 그만두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동료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던 그다. 그는 어떨까. “밤 10시에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현장에 달려가고, 새벽 3시에 강릉 주문진항에 도착해 첫 출항 취재를 나가곤 했어요. 몸이야 피곤했으나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한때 15명이 넘던 서울신문 사진부는 5명이 일한다. 취재부서가 의뢰한 사진 위주로 취재하고 신문 지면은 통신사 사진으로 메꾸고 있다. 현장에 나가더라도 후다닥 찍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신문 사진은 언론사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기획에 집중해야 하는데 ‘지면에 사진 한 장 쓰는데 기본만 하자’라는 인식이 뉴스룸 안팎에 퍼져 있다.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해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해야 하는데 아직 우리 언론 현실에선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6월부터 사진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장석에 앉아보니 사진부의 인력난이 뼈아프다. 이런 현실에서 더팩트의 사진 한 장은 그에게 특별했다. 더팩트는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이춘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휴대전화 앱을 열어 보좌관 이름으로 주식거래를 한 장면을 촬영해 5일 보도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이 의원은 법사위원장직을 사임했고 민주당은 이 의원을 제명했다. “더팩트라고 사진부 인력이 많지 않거든요. 1~2년에 한 번 나오더라도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이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미드저니 등 사용자가 입력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미지로 생성하는 인공지능(AI)이 등장했다. AI 이미지 플랫폼은 사진기자의 영역을 잠식할 수 있을까. 그는 정보수집과 판단, 현장 대응 능력은 AI가 따라올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진기자는 일상생활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걸 찾는 존재라면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어떤 기자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라는 구절을 가져와 말했다. “사진기자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예요. 내가 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감사한 직업이죠. 사진기자의 존재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