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새벽, 난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들고 빠져나왔다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⑨이영록 동아투위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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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고 홍종민 기자(오른쪽)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한가운데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가 보인다. /자유언론실천재단

5월은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이란 말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5월 하면 1980년 5월의 5·18광주민주항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연스레 읊조려진다. 그러나 나는 이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목이 메어서다. 특히 ‘동지는 간 곳 없고 깃발만 나부껴’ 하는 대목에 이르면 더 그렇다. 서울에 6411번 노회찬 버스가 있다면 광주엔 518번 버스가 있다. 이맘때 광주 시내에서 518번 버스를 타고 망월동 5·18묘지를 갈 때 버스 창문을 열면 길 양편 가로수로 서 있는 하얀 이팝나무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향긋하면서도 조금은 슬픈 냄새가 묻어난다.

동아투위 깃발 문구는 ‘自由言論實踐宣言’(자유언론실천선언)이다. 지금은 언론계 모두가 공유하는 모두의 깃발이 되었다. 1975년 3월17일, 132명이 모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그해 중반 일부 사원이 복귀한 후 남은 113명은 동아투위 깃발 아래 50년을 함께해왔다. 지금 이들 중 41명이 세상을 떠났다. 동아투위가 애용하는 이 깃발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동아투위 이계익 선배가 썼던 대형 족자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신영복 선생이 동아투위에 써준 쇠귀체 글씨다. 두 분 다 지금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

2024년은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편집국에 모여 언론자유를 ‘실천’하자는 의지를 다짐했다. 늘 써왔던 ‘언론자유’ 대신 ‘자유언론’을, 그리고 ‘수호’ 대신 ‘실천’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했다. 그 의지가 오늘까지 이어져 어언 반세기가 된 것이다.

이계익이 몰래 준비한 ‘自由言論實踐宣言’ 족자

‘自由言論實踐宣言’의 대형 글씨를 쓰고 족자 형태로 만든 주인공이 이계익 선배였다. 3층 편집국 중앙 기둥 한 면을 꽉 채우다시피 한 작품이었는데 서체에 힘이 넘쳐났다. 웬만한 서예가도 쉽지 않은 대작을 미리 마련해서 기자총회 날 아침에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계익 선배는 글씨며 그림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나중에 동아투위 회보 ‘진동아(眞東亞)’에 만평이며 4컷짜리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신문사를 나와서는 자전 소설 ‘소양강의 뱃사공’(정우사)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홀어머니를 모시며 소년 뱃사공 노릇을 해 가계를 보태기도 했던 소싯적 얘기다. 나중에는 아코디언에 심취해 수준급의 실력을 과시했고 동아투위 안에서 청출어람의 후배(?)를 양성하기도 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에 걸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자유언론실천재단

이계익 선배는 해직 후 한때 중앙대학교가 운영하던 ‘주간시민’ 이라는 잡지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나도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서울시의 홍보지 역할을 했었는데 동아투위 식구들 7~8명이 함께 일하게 되면서 논조가 완전히 바뀌는 바람에 정간(사실상의 폐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이름 없는 주간지의 정간 기사가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의 외신면 톱기사가 되기도 했다.

기억나는 것은 당시 나라 안 명사들을 찾아가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표지 뒷장에 전면으로 실었었는데 내가 맡아 취재한 이 중 한 사람이 이름 있는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었다. 강원룡(姜元龍) 목사와도 가까이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다. 취재가 끝나고 글씨를 하나 써주겠다고 해서 소품 한 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슨 글을 써주면 좋겠느냐 해서 자유진리(自由眞理)를 부탁했다. 요한복음 예수의 어록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에 꽂혀서 이런 부탁을 했는데 다만 순서를 진리보다 자유를 앞에 써달라고 했다. 자유에 목말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자유가 오염된 채 과소비되고 있다. 태극기와 함께.

이 족자는 1975년 3월17일 아침까지 편집국 중앙 벽면에 게시돼 있었다. 그날 새벽, 술에 취한 깡패들이 포함된 일군의 폭도들에 의해 신문사 편집국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상황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가 걸려 있는 편집국 중앙에 모여 총회를 열고 예의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자유언론 만세와 동아일보 만세를 부르고 나서 편집국 3층 계단 통로를 통해 동아일보사를 빠져 나왔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편집국 사회부장석 뒤 벽면에 버티고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대형 족자였다. 모두 긴장되고 어수선한 탓이었는지 족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신경을 못 썼던 것 같았다. 그 족자를 동아일보사 안에 그대로 두고 나오면 안 될 것 같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순간 나도 모르게 족자를 거두어 잘 말아서 들고 나왔다. 그 길로 내가 살던 대조동 처갓집으로 가져갔다.

나는 1974년 봄 동아일보 노조 사태로 한 달간 회사를 쫓겨난 적도 있었고, 백지광고 사태 후 이어진 해직으로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사위가 실업자가 되자 처가에서는 다섯째 딸 식구들 걱정에 처갓집 지하층에 우리를 들어와 살게 했다. 거기다 아내가 둘째 출산을 앞둔 때였으니 걱정도 됐을 터였다.

내가 족자를 들고 회사를 빠져나온 그날 새벽 동아일보사 정문 바로 앞마당에서는 전날부터 사태를 걱정해 나와 있던 수많은 독자와 시민, 그리고 명망 있는 민주인사들이 가는 비마저 뿌리는 3월의 새벽 찬바람 속에서 우리를 열렬히 격려하고 응원해주었다.

우리는 사태 당일 오전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에 모여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활동 방향을 모색했다. 우선 동아사태 진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광화문 국제극장 옆 골목길에 있던 세종여관에 일단 임시 거점을 마련했다. 내 기억으로는 집으로 가져갔던 문제의 족자를 그 후 세종여관으로 다시 가져왔었던 것 같다. 당장 어디에 내걸만한 자리도 없고 여건도 안 되었다. 그 후 족자의 행방에는 다들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동아일보사를 나온 이후 6개월 동안 줄곧 신문사 앞에서 신문회관까지 도열 시위를 하면서 신문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기자와 독자, 시민들을 상대로 동아투위가 제작한 동아사태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나눠준 다음 신문회관에 가서 정리 집회를 가지면서 그날그날의 활동을 이어갔다.

1975년 6월24일. 이날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동아투위 발족 100일째가 되는 날인데다 동아투위가 미국의 ‘A·D(Anno Domini)’지로부터 러브조이 자유언론상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이 상은 1837년 미국 일리노이주 엘튼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가 항의 군중의 신문사 습격 때 희생된 장로교 목사 엘라이자 패리쉬 러브조이를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왔는데 외국인이 이 상을 받은 것은 동아투위가 처음이었다. 동아일보사가 아닌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거리의 동아투위가 말이다.

이영록(사진 가운데) 위원은 ‘이화여대생 동아일보 해직자 돕기 손수건 사건’과 관련해 1975년 6월24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돼 보름 넘게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다. 사진 왼쪽은 함께 연행된 이태호 동아투위 위원. 맨 앞은 마중 나온 임부섭 위원. /자유언론실천재단


이화여대생 동아일보 해직자 돕기 손수건 사건

나는 시상식을 마치고 나오다 신문회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복형사에 의해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됐다. 다음 날에는 이태호 기자가 연행되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는데 경찰서에 잡혀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대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선동했다는 혐의였다.

이화여대생들의 ‘동아돕기 손수건 사건’으로 명명된 이 일은 김매자·김경애 등 일부 이대생들이 손수건에 의미 있는 그림이나 글씨를 입혀서 그 판매수익금으로 동아일보 해직언론인들을 돕자는 것이었는데 중간에 문제가 된 것이다. 나와 이 기자는 해직되기 전 각기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로 이화여대를 출입했는데, 동아사태 후 진상을 알리는 차원에서 자체 제작한 유인물을 잘 아는 교수나 대학학보사 등에 배포했다. 이 유인물이 학생들 손에 들어간 것이 빌미가 되어 당국이 우리 둘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행한 것이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우리는 영장 없는 구금상태에서 보름 넘게 조사를 받은 후 7월9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형무소 담장 위에서 이쪽저쪽을 오가다 구속은 면했지만 학생들 몇몇은 검찰에 송치되어 몇 달간 고생하기까지 했었다. 우리만 먼저 풀려나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내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직후 서대문경찰서에 함께 출입했던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대조동 집을 찾아와 혹시 경찰이 압수수색에 들어갈지 모르니 의심을 살만한 것들은 다 없애라고 귀띔을 해주고 갔다고 했다. 그 기자의 연통을 듣고 아내는 내가 써왔던 취재수첩은 물론 좀 불편한 책자, 자료, 그리고 집에 두었던 이대생들이 만든 동아돕기 손수건 등을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막스 웨버가 칼 막스(마르크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해서 그의 책이 좌경서적으로 몰리던 세월이었고, 걸면 걸리던 시절이었음에야. 나는 문제의 족자도 그때 없애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아내는 그런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튼 찜찜한 채로 시간이 흘렀지만 족자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동아투위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경찰이나 중앙정보부 등 사찰기관 쪽에도 의심을 가져봤지만 그 시절에는 언터처블이었다.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1990년대 말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나는 이 족자의 행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언론인 출신 지인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요직을 맡게 돼서 그에게 안기부 내에서 그 족자의 행방을 찾아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한참 뒤에 돌아온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보기관을 의심했지만 족자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18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 족자가 나왔다. 문제의 족자가 작고한 동아투위 동료의 집 서재에서 나온 것이다. 이사를 하면서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 족자가 나왔다고 유족이 동아투위 쪽에 알려옴으로써 실물이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아마 작고한 강정문 위원이 당국의 압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서재에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모양인데, 후에 그가 취업한 직장 일로 바쁜 데다 득병까지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종적을 몰랐던 것이다. 그동안 애꿎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던 것이 그쪽에는 약간 미안하지만 그것도 업보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동아투위는 40여년 세월이 지나면서 원본 자체가 마손 위기에 이른 이 족자를 전문기관에 의뢰해 보존처리를 서둘렀다. 그리고 2018년 10월17일에 ‘생환(生還)’(?)한 자유언론실천 족자를 43년 만에 처음 일반에 공개하면서, 이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관장 주진오)에 기증해 영구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둘러싸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투위는 2018년 10월17일 이 족자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2018년 10월17일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기증식에서 이영록 동아투위 위원이 족자 관련해 이야기하고 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계익 기자가 쓴 이 족자를 편집국 중앙 기둥에 내걸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자유언론실천선언 깃발의 또 다른 버전은 쇠귀 신영복 선생(1941~2016)이 이른바 쇠귀체로 쓴 ‘자유언론실천’ 6자짜리 글씨이다. 동아투위의 한글 깃발 ‘자유언론실천’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평소 가까이 지냈던 당시 동아투위 요요회 김태진 회장의 부탁으로 써준 것이다. 요즘 말로 재능기부였던 셈이다.

이계익 선배가 쓴 한자로 된 ‘自由言論實踐宣言’ 족자의 소재를 몰라 90년대 초에는 신영복 선생이 쓴 이 한글 ‘자유언론실천선언’ 깃발이 여러 군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주로 동아투위 등산모임인 요요회 산행 때나 별세한 동지들의 장례식장에서 근조기로 쓰이는 등 동아투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주로 사용되었고, 2011년 이후에는 언론단체의 합동산행에도 자주 얼굴을 내보였다.

신영복 선생(1941~2016)이 쇠귀체로 쓴 ‘자유언론실천’ 글씨. 신영복 선생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김태진 동아투위 위원 부탁을 받아 이 글씨를 썼다. /자유언론실천재단
2012년 3월17일 동아투위 결성 37주년을 기념해 춘천 오봉산에서 열린 언론단체 관계자들이 쇠귀체로 쓴 ‘자유언론실천’ 깃발 아래서 시산제를 지내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신영복.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진보학계를 대표해온 경제학자이자 문학가였다. 젊은 시절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수감 생활 당시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책으로 엮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문명을 날렸다.

1988년 8·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성공회대 강사, 사회과학부 교수, 대학원장 등을 거친 다음 2006년 정년퇴임을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물론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변방을 찾아서’, ‘느티아래 강의실’,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신영복체(쇠귀체)로 불려지는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졌었는데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 두산에서 나온 소주 ‘처음처럼’, 교보문고 신용호 회장의 어록인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이 만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람이 먼저다’의 글씨도 그가 쓴 것이다.

‘처음처럼’은 그의 작품이 술 이름에 쓰인 상업적인 사례인데 이 때문에 저작권료를 고집하지 않는 대신 사례비로 받은 1억원을 성공회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글씨 때문에 일부 보수 우익진영 사람들은 이 소주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다소의 논란도 뒤따랐다.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사상적 편력을 문제 삼아 국가정보원의 원훈석(院訓石)에 쓰인 글씨를 폐기하고 애초에 썼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로 되돌려지기도 했다. 이는 작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육사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둘러싼 시비와도 일맥상통하는 짓거리다.

이영록 동아투위 위원.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동지는 간 곳 없고 깃발만 나부껴…. 동아투위 위원들의 나이가 다들 팔순을 넘겼고 세상을 뜬 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비바람 몰아치던 지난 5월15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나와 동아일보 12기 입사 동기 국흥주(鞠興柱)씨가 갔다. 박학다식하고 여러 외국어에 능통해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국 천재라고 불렸던 그가 41번째로 세상을 떴다. 30년이 넘도록 투병했지만 끝내 말 한마디 못하고.

이제 누가 살아남아서 자유언론의 깃발을 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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