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 선생에 원고 받아 나오는데, 두 남자가 달려들었다"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②신홍범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75년 3월11일. 6일 간 농성투쟁 끝에 남은 조선일보 기자 30여명이 회사에서 쫓겨나자 전체 기자들이 회사 앞에 모여 조선일보 규탄집회를 가졌다. /김천길 AP통신 기자


1975년 3월6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총 궐기하여 제작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우고 조선일보를 ‘정론지’로 만들라는 것이 기자들의 요구였다. 6일 동안 계속된 농성투쟁 과정에서 32명의 기자가 해직되었다.


해직된 후 나는 약 1년 반을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서울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취직을 부탁할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의지할 데라고는 고향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어머니밖에 없었다. 1976년 가을 나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을 작정이었다. 나는 농촌에서 나고 자라고 살았기 때문에 농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내가 농촌생활을 견디어낼지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내려 왔지만 나에겐 맡겨진 일이 있었다. ‘조선투위 소식’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 천관우 선생에게 청탁해 놓은 원고를 받으러 서울로 가야만 했다. 1977년 3월8일로 기억한다. 서울로 올라와 그날 밤을 불광동에 있는 여동생네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오전 10시쯤 천관우 선생 댁을 찾아갔다. 천 선생 댁은 여동생네 집에서 약 500~600m 쯤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천관우 선생에게서 받은 소중한 원고를 몸에 간수하고 댁을 나와 조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집이 좋은 두 남자가 나에게 달려들더니 양 옆에서 내 팔을 꽉 잡고 나를 멈춰 세우는 것이었다. 내 이름을 대더니 맞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자기들과 함께 가줘야 하겠다는 거였다.

1986년 12월 보도지침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신홍범 기자가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며 방청나온 동료들에게 묶인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조선투위 제공


느닷없는 일이어서 많이 놀랐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가 보시면 안다”는 대답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지프(Jeep)차에 나를 태웠는데, 그들은 운전사까지 모두 3명이었다. 차에서 다시 물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그런데 대답은 또 같이 “가보시면 압니다”였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오던 정보과 형사와 많이 달랐다. 나는 그들이 중앙정보부에서 온 수사기관원들이라고 믿었다. 언론인들을 데려다가 족치는 데가 중앙정보부의 남산이었으므로 그곳으로 끌고 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프차의 창에 다행히도 커튼이 처져 있지 않아 달리는 차 안에서 지나가는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남산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곳으로 끌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한참 달리다 바깥을 보니, 어라(?)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보니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것 아닌가? 경부고속도로? 나를 데려갈 만한 수사기관은 모두 서울에 있는데, 여길 왜 가지?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던 차가 천안 나들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후미진 곳으로 나를 데려가 폭행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달려 차가 선 곳은 진천경찰서였다. 내 고향 충북 진천이었다. 형사 하나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고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신 선생님,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지요? 진천경찰서입니다. 저희들이 댁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깍듯이 나를 ‘신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정중하게 대해주는 데 놀랐다. 우리 집은 진천 읍내로부터 30리쯤 떨어진 농촌 마을에 있었다.


내 마음은 이윽고 편안해졌으나, 한편으로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이고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난데없이 웬 진천경찰서 형사들이 서울로 올라와 나를 잡아 진천으로 끌고 내려왔단 말인가? 내가 천관우 선생 댁을 찾아간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리다가 나를 붙잡았다는 말인가? 평소 나는 진천경찰서와 인연도 접촉도 전혀 없었다.

1983년 6월 신홍범 기자(사진 왼쪽)는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총무로 뽑혔다. /조선투위 제공

“요시찰들을 잘 감시하고 집에 붙잡아 두라!”

진천경찰서 정보과 형사들과 며칠 동안 접촉하면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근로자의 날’(3월10일) 때문이었다. 이날을 앞두고 치안본부에서 전국의 경찰에게 요시찰 대상자를 잘 감시하고 그날 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라고 지시한 것이 이런 일을 불러온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를 감시해오다가 갑자기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는 부랴부랴 서울의 내 여동생 집을 찾아내 뒤를 밟고 나를 붙잡은 것이다.


지금은 메이데이(May Day)라고 해서 5월1일을 노동절로 부르지만, 당시엔 ‘근로자의 날’이 3월10일이었다. ‘노동’이란 말조차 금기로 여겨 노동자를 ‘근로자’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노동운동은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이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친 ‘인간선언’에 가까운 것이었다. 더 이상 비참하게 살 수 없다는 비명이고 절규였으며, 그래서 격렬하게 노동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들 노동자들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결합하는 것을 당국은 두려워했을 것이다.


‘근로자의 날’ 며칠 전 요시찰들을 잘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 같았다. 시골의 경찰은 그들 조직의 꼭대기인 치안본부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고 보니 몹시 긴장했을 것이고, 자칫 실수했다가는 어떤 문책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인지도 몰랐다.

준 연금 상태와 같은 날들이 3월10일 이후에도 약 5일 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이 잘 보이는 이웃집에 방을 얻어 형사들이 번갈아 자면서 수시로 나에게 ‘문안을 드리러’ 왔다. 고향 친구들과 물고기를 잡으러 가면 그곳까지 따라 왔으며, 약을 사러 200리 떨어진 ‘전의’라는 곳을 찾아갈 때는 그곳까지 태워다주고 데려왔다. 겁먹은 시골 경찰의 과잉대응이었다.

1975년 3월10일 ‘3·6자유언론실천운동’ 농성 100시간째를 맞아 기자들은 투쟁 결의를 다지며 기념 촬영을 했다. /조선투위 제공

감시와 사찰 속에서 살았던 시대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내가 47년 전의 이 어이없는 에피소드를 여기에 불러온 것은 우리가 지난날 어떤 시대, 어떤 세상을 살았는가를 함께 돌아보고 싶어서다. 당시 나는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 위원장도 아니었다. 투위의 한 사람으로 유인물을 만들고 배포하는 일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이니 그곳에서 활동이 사찰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평범한 활동을 하던 보잘것없는 내가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면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요시찰 딱지를 달고 살았겠는가? 그런 사찰을 받으며 산 사람들이 아마 아주 놀랄 만한 숫자에 이를 것이다. 수많은 우리 국민들이 살벌한 감시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해직 언론인 가운데 동아투위(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이부영 위원(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현 동아투위 위원장)이나 성유보 위원(작고, 언협 초대 사무국장, 민언련 이사장 역임 )같은 사람은 일찍부터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으니 그들은 매일 같이 살벌한 감시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었다.


나는 저들이 나를 어떻게 보았기에 요시찰 대상에 올려놓았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것을 조금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90년 10월4일 당시 보안사에 복무하고 있던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을 하고 터뜨린 보안사 민간인 사찰자료가 <말>지의 부록으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나는 보안사에 내 기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들의 기록에 나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개인 특성: 겉으로 보기엔 양순해 보이나 사실은 표독한 자로서…” 조선투위와 언협에서의 내 활동이 간략하게 적혀 있을 뿐 그밖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표독한 자’라는 것이 사찰의 이유였다는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 편을 찾아보니 이러했다. “개인 특성: 사상이 불투명하며, 권모술수와 기만으로 정치생활 30년을 일관한 신뢰성이 전혀 없는 위험인물.”

신홍범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검찰공화국 시대를 사는 아이러니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대를 몇 마디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끔찍한 암흑시대’였다고 말하고 싶다. 말하며 살게 돼 있는 사람이 맘 놓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감시당하고 사찰당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았다. 다방에서 사람을 만나도 주변에 수사기관원이 없나 살펴보아야 했고, 전화도 도청 때문에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혹시 미행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했다. 주요 기념일이나 집회가 있는 날이면 저들이 미리 찾아와 외출을 막고 가택 연금시키거나 닭장차에 태워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떨어뜨려 놓곤 했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박종철 열사처럼 고문당하다 죽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감옥에 갔는데, 그 악행의 주역이 검찰이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감옥에 보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김지하와 리영희 선생이 당한 일들이 그것을 증언해 준다.


김지하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형을 살다가 1975년 2월15일에 나와서 3월13일에 다시 구속되었다. 동아일보에 쓴 ‘1974년 겨울, 고행’이란 글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들은 김지하의 집에서 찾아낸 ‘장일담’과 ‘말뚝’이라는 메모 쪽지를 가지고 김지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려 했다. 작품으로 실현되지도 않은 머릿속 구상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폭로한 것이 김지하의 유명한 ‘양심선언’ 사건이다.


리영희 선생은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에서 “모택동이 진시황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라 썼다가, 그리고 중국인의 식생활 문제를 다루면서 “중공에서도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살고 있다”고 썼다가 1977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1심에서 3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주제일지라도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과 다르게 쓰면 공산주의에 대한 고무 찬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리 선생에 대한 판결문은 내용이 공소장과 두 군데만 다를 뿐 (백낙청 교수의 출신 대학 이름을 바로잡은 부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8600자였다고 한다. 공소장을 그대로 베껴서 판결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후를 살펴보면 법원이 공소장을 베껴 판결문을 만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판결문을 만들어 법원에 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판결문과 공소장에 수기(手記)로 쓴 영문글자가 동일인에 의해 쓴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권력이 하라는 대로 사악한 짓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사람들은 검찰을 ‘독재정권의 개’라고 불렀다. 주인이 물라고 하면 사람을 무는 개 말이다. 국민들은 ‘검찰’과 ‘언론’을 군사독재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둘은 국민들의 격렬한 분노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라가 민주화되면 반드시 그 죄상을 밝혀 벌하고 개혁해야 할 원성(怨聲)의 대상이 되었다. 검찰을 국민의 지배하에 두고 그 권력을 축소시켜야 하며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또 다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국민들이 군사독재를 물리친 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옛날 그렇게 다짐했던 ‘검찰 개혁’은 이루어졌는가? 언론개혁은 이루어졌는가? 검찰이 단 한 번이라도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다”가 그 답이다. 준엄한 개혁의 대상이었던 그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그 휘하의 검찰이 칼을 휘두르는 ‘검찰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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