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기자 징계, 보도국장 개입 정황
징계 대상자 선정 과정 등에 적극 관여 드러나
"기자 보호해야할 수뇌부 오히려 내치나" 비판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 입력
2009.07.15 14:44:17
지난달 9일 밤 고대영 KBS 보도국장은 보도국 몇몇 팀장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에 대한 신임투표 개표가 끝난 이후였다. 그는 이날 통화에서 신임투표를 주도한 기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날 일부 팀장들은 개표에 참여한 기자들에게 경위서 작성을 요구했다.
기자들이 거부하고 이 문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경위서는 슬그머니 철회됐다. 하지만 한달이 조금 못 된 지난 3일 보도본부는 사규 위반을 이유로 기자 3명을 징계 대상자로 확정해 인사운영팀에 통보했다. 이 명단에는 당시 고 국장이 거명한 기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KBS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방송의 문제점과 관련해 신임 투표를 주도한 기자들을 징계하는 과정에서 보도국장이 대상자 선정을 주도하는 등 징계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기자 징계의 적정성 여부와 별도로 기자를 보호해야 할 수뇌부가 기자를 내치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기자와 소통보다는 징계의 칼날로 보도국을 통제하기에 급급한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팀장 의지 무관하게 결정
기자들은 보도국장이 징계 대상자 5명을 추리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29일쯤 일부 팀장들은 징계 대상에 포함된 기자들을 불러 “인사위에 회부될 것 같다”, “미안하게 됐다”, “(징계 동의서에) 서명했다”, “유감이고 안타깝다” 등의 말을 했다.
사실상 팀장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징계 대상자가 결정됐다는 얘기다. 최소한 윗선인 보도국장급에서 대상자를 선정해 내려 보냈고 팀장들은 그 내용만 전달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소속 기자가 징계 대상에 포함됐다가 제외된 부서의 한 간부는 “징계 대상자가 5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보고 받지도, 대상자를 결정하지도 않았다”고 말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
기자 징계를 막아야 할 보도국장이 징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고 국장은 신임투표를 받은 5명 가운데 가장 높은 93.4%의 불신임 표를 받았다. 특히 과반수의 기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보도국장에 대한 불신의 정도를 극명하게 보여준 투표결과였다.
보도본부 한 기자는 “보도국장이 이병순 사장 연임 여부와 상관없이 경질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등 이번 신임투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면서 “불같은 성격으로 기자들의 신임투표를 용납할 수 없었던 데다 본보기식 징계를 통해 조직 장악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고 말했다.
고대영 보도국장은 “징계건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홍보실하고 얘기하라”고 말했다.
감사실 재조사 착수하나
보도본부는 인사운영팀에 보낸 징계 요청서를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본부 고위 간부는 “(징계가) 없는 것으로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징계가 일단락된 것이 아니라는 게 보도본부 내부의 전언이다. KBS 감사실이 전면 재조사에 착수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보도본부가 인사운영팀에 올린 징계 대상자에는 중간에 개표 현장을 떠난 기자가 포함되는 등 허술한 부분이 있었던 만큼 재조사를 통해 보완한 뒤 나중에 징계를 추진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보도본부의 또 다른 기자는 “일단 한걸음 물러났을 뿐 징계를 없던 것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연주 사장 해임 반대 및 이병순 사장 취임 반대를 주도했던 사원행동 소속 기자와 PD들이 징계를 받은 것도 수 개월이 지난 뒤였다”고 말했다.
KBS기자협회(회장 김진우)는 기자 징계 사태 전반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였으며, 그 결과를 15일 기협 운영위원회에 보고한 뒤 대응방안을 찾을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