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는 낙하산의 무덤"

MBC 노보, 노조와 낙하산 사장 악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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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새 사장에 유력 후보로 꼽혀온 구영회 MBC 미술센터 사장과 김재철 청주 MBC 사장 등 15명이 지원한 가운데, MBC 노조는 ‘누가 오든 정권과 방문진의 용병 사장’이라며 투쟁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MBC 노조는 22일 발행한 노보를 통해 역대 낙하산 사장의 행적을 거론하며 “MBC는 낙하산의 무덤”이라고 밝혀 눈길을 끈다. 노조에 따르면 그동안 MBC에는 황선필·김영수·최창봉·강성구 등 4명의 낙하산 사장이 있었다.

16대 황선필 사장(1986년 2월~1988년 8월)은 전두환 정권의 대변인 노릇을 하다 1986년 MBC 사장으로 낙점돼 정권 홍보맨 역할을 충실히 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여당 후보 지원을 위해 후보 사무실에 MBC 직원을 파견하고 회사 차량과 사무실을 무상 대여해주었으며 야당 후보의 얼굴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뉴스에서 야당 후보의 뒷모습이나 손가락만 찍어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1987년 12월 MBC 노조가 설립된 뒤 노조 탈퇴 강요, 보복인사 등 전횡을 휘둘렀던 그는 이듬해인 8월26일 MBC 노조가 한국방송 사상 최초의 파업에 들어가자 사흘 만에 사퇴했다.

17대 김영수 사장(1988년 11월)은 일주일도 못 버티고 물러났다. 김 사장은 유신정권이 임명한 '유정회' 국회의원 출신으로 전두환 정권의 핵심인 이른바 'TK' 인맥으로 사장에 입성했다가 노조의 출근 저지투쟁에 사퇴했다.

18~19대 최창봉 사장(1989년 2월~1993년 3월)은 방송문화진흥회가 선임한 최초의 사장으로 정치권의 입김이 배제된 방송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MBC 구성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최 사장은 1990년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에 대한 방송 연기를 중단해 제작진과 마찰을 빚었고, 이를 항의하는 안성일 노조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해고했다. 1991년에 정권이 방문진 이사회에서 최 사장을 유임하라는 압력설이 가했다는 외압설이 불거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1992년 9월 MBC 50일 파업으로 연결됐다. MBC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이완기 노조위원장과 손석희 아나운서 등 노조 집행부가 잇따라 구속됐다. 결국 최 사장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20~21대 강성구 사장(1993년 3월~1996년 6월)은 땡전 뉴스를 방불케하는 ‘땡김 뉴스’와 각종 불공정 보도, 정권 홍보 방송을 쏟아냈다. 그러다 1996년 재선임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의 개입이 드러나면서 노조의 파업이 시작됐다.

24일간 계속된 파업에 강 사장은 사퇴를 약속했지만 파업이 철회된 후 사퇴를 번복하며 노조 집행부에 집단 징계를 내렸다. 이에 노조는 ‘제2차 강 사장 퇴진운동’을 선포했고 보도국 기자 174명은 집단 사퇴서를 제출하며 맞섰다. 석달간의 투쟁이 이어졌고, 그해 6월 강 사장은 자진 사퇴했다.

한편 MBC 노조는 이날 신임 사장 공모와 관련해 성명을 내어 “이사장 김우룡을 비롯한 공영방송 파괴 ‘5적’ (차기환, 최홍재, 김광동, 남찬순)이 점령하고 있는 한, 방문진이 지명하는 그 어떤 사장도 국민의 채널 MBC를 권력의 채널로 바꾸려는 정권의 용병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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