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김성수·조선 방응모는 '친일인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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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 김구선생 묘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주최로 열린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에서 김병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왼쪽부터), 윤경로 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을 백범김구선생 묘소에 헌정하고 있다.(뉴시스)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1891~1955)와 조선일보 창립자인 계초 방응모(1883~?)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인사로 수록됐다. 이 밖에 장지연(황성신문 주필), 박석윤(매일신보 부사장), 현영섭(내선일체 실천 이사) 등도 친일언론인으로 등재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이하 편찬위원회)는 8일 오후2시 서울시 숙명여대 숙명아트센터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통해 이들이 친일인사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조선·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까지 언급하며 편찬위원회의 이번 친일인명사전을 비판했다. 다음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밝힌 김성수, 방응모의 친일행각이다.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위



   
 
  ▲ 인촌 김성수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난 뒤부터 두드러졌다. 김성수는 1937년 7월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30일과 8월2일 2일간 담당했으며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천원을 헌납했다. 이어 9월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다음해인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고 8월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생활개선위원회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9년 4월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1년 5월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해 8월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지냈다. 이어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했으며 10월 감사에 뽑혔다.

특히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김성수는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되었다”면서 “지난 오백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무 기풍을 조장하여 문약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서 인고·단련할 것”을 청년들에게 요구했다. 또한 “이를 실천할 지름길로서 황국신민의 서사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 20일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활동에 나섰다. 11월6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학도출진 관련 좌담회에서 학도병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에서 찾았다.

11월6일자 매일신보에 ‘대의에 죽을 때까지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싣고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편찬위는 “여기서 말하는 의무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서 살아오면서 받은 국가·가정·사회의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촌 김성수는 “만약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서 ‘대동아 건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제국의 제일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우, 곧 권리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일본인은 3천년 동안 의무를 수행하여 권리를 얻었지만 조선인은 단시일이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랫동안의 희생에 필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편찬위에 따르면 “그 의무는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곧 죽을지도 모를 학병에 지원하는 것”이다.

12월10일엔 매일신보에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며 한 사람도 주저함 없이 “광영스런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고 편찬위는 전했다. 또한 12월17일 보성전문학교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 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 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

인촌 김성수는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으로,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동아일보 사장에 재취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로 선출됐다. 1947년 2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1951년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돼 1952년까지 활동, 1955년 2월 18일 사망했다.

◇계초 방응모의 친일행위



   
 
  ▲ 계초 방응모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계초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1933년부터 두드러졌다. 방응모는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 부사장에 취임한 후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천6백 원을 헌납했다. 그해 10월에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했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으로 추대됐으며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 단체이다.

편찬위에 따르면 방응모는 1935년 10월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이후 1936년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과 강제 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 또한 전선지국 시찰에 나선 방응모는 원산·함흥·청진을 전전하며 자비로 강연회와 좌담회를 개최했다.

방응모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 강연에서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 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했다. 편찬위에 따르면 “방응모가 망언을 서슴치 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방응모는 1937년 7월11일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문했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하자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방응모는 1937년 7월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8월 21일 경성방송국에서 “지나(중국)는 쓸데없는 배일을 일삼아 제국에 도전하여 극동의 평화를 교란시키므로 일본제국은 극동의 화인이 되는 지나의 배일을 절멸케 하여 국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는 시국강연을 했다.

또한 1차 전조선순회시국강연을 개최, 9월 6일부터 12일까지 의정부 양주공립보통학교·연천공립보통학교·개풍군·김포군·강화공립보통학교·부천 소사역 앞 진흥관 등에서 ‘지나 사변의 원인과 지나에 대한 세계 열국의 대세와 금후 국민의 각오’를 주제로 강연했다.

편찬위에 따르면 방응모는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에서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고, 같은 달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조선에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을 축하했다.

1940년 3월에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로 선출됐으며 1941년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동방흥업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특히 1941년 11월 창간 5주년 기념 권두언에서 방응모는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안으로는 신체제의 독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해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국민은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2년 2월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라는 특집에서도 ‘타도 동양의 원구자’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대동아전쟁, 즉 태평양전쟁 개전 소식을 들을 뒤 감상이다.

방응모는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요,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 참아오던 원한의 폭발”이라고 썼다.

그러나 해방 직후 1945년 8월 말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 8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9월 독촉국민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아·조선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반발

반면 조선·동아일보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동아는 9일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사관 친일사전’에서 “이 조직이 친일인사였다고 주장하는 4389명의 명단과 함께 일방적으로 짜깁기한 ‘친일 행적’이 실려 있다”며 “우리 사회 내부에서 친일 논란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저의와 이 조직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조직은 좌파 인사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너그럽기 그지없다”며 “광복 전후 좌익의 한 축을 이뤘던 몽양 여운형은 친일단체 활동 행적이 제기됐고, 신문 등에 그의 학병 권유문이 실렸으나 친일 명단에서 제외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도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 대회’에서 “광복직후 친일파 청산 의지가 치열했던 반민특위가 가려낸 친일인사가 688명, 항일독립운동 원로들의 모임인 광복회가 2002년에 내놓은 친일인사 명단이 692명이었다”며 “그런데 조국 광고 운동에 손가락 하나 담근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그때보다 6배나 많은 사람을 친일 인사로 사전에 실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민 성금으로 이 사전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국민 세금을 8억원이나 지원했었다”며 “아까운 국민 세금이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데 쓰인 꼴”이라고 말했다.

◆인촌 김성수는=1891년 10월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 1917년 3월 교장에 취임했다. 이해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경영했다. 1918년 중앙학교 교장을 사직,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고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같은 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 활동하다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친일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조사결과다.

◆계초 방응모는=1883년 12월6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22년 6얼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에 임명됐다.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하고 경영을 확대해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 1927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을 맡았다. 1930년 정주에서 평안북도 도평의회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33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며 이후부터 친일행위가 두드러진다는 편찬위의 지적이다.

민왕기 기자 wanki@journalist.or.kr 민왕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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