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제63회 방송의 날’을 맞아 KBS가 박장범 사장의 기념사를 하루 먼저 공개했다. 2일 KBS가 보도자료 형태로 발표한 기념사에서 박장범 사장은 “엄혹함을 넘어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공영방송의 경영 현실을 토로하며 “KBS 역시 올해도 적자가 예상되는 등 재정적 한계 상황에 도달해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치권과 정부가 보여준 대응은 아쉽고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이어 “1981년부터 지금까지 소비자물가는 5배 가까이 상승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급되는 국회의원의 세비는 45년 전과 비교해 물가상승률을 훨씬 뛰어넘는 인상률을 기록했다”면서 “그러나 공영방송이 국민을 위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재정 기반인 수신료는 반세기 가까이 방치해 두었다”고 비판했다.
이날 배포된 보도자료에도 <박장범 KBS 사장 “45년 동결 수신료…국회의원 세비는 물가상승률 뛰어넘어”>란 제목이 달렸다. 수신료 인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특별히 국회의원 세비를 콕 집어 언급한 것이다.
짜장면값과 비교하던 수신료를 이번엔 왜?
KBS는 그동안 수신료 동결 문제를 언급할 때 주로 짜장면 가격 등을 비교 대상으로 들었다. 지난해 5월 수신료 현실화 등 재정 안정 대책 마련 권고를 담은 ‘KBS 전국시청자위원회 공동선언문’ 관련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KBS가 첨부한 자료에서도 껌, 짜장면, 신문 구독료와 비교한 그래프가 등장했다. 수신료가 44년째 그대로인 동안 신문 구독료는 10배, 짜장면 가격은 15배가 뛰었다는 취지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소비자 물가상승률과 함께 다른 것도 아닌 국회의원 세비를 언급했을까.
우선 박 사장이 밝힌 대로 국회의원 세비가 물가상승률을 크게 웃돌 만큼 많이 오른 것은 맞다. 정확한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1979년 9월 중앙일보가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80년 당시 국회의원 세비는 약 166만원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1억6000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 46년 사이에 100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 국회의원 세비만 많이 올랐을까. KBS 임금은 어떨까. 역시 1981년 당시 KBS 직원 급여와 관련해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구글 제미나이가 옛날 신문 기사 등을 근거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80년대 초 신입사원 월급이 20만원대였으며, 비교적 급여 수준이 높았던 방송사는 3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연봉으로 계산하면 약 350만원 수준이다.
지금은 어떨까. 2025년 KBS 경영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KBS 초임 연봉은 약 5500만원이었고, 가장 높은 M1(25년) 직급은 1억4144만원을 받았다. 인건비 총액(임금복리비+퇴직급여) 4283억원을 임직원 수 3745명으로 나눈 금액은 평균 1억1440만원이다. 초임 기준으로만 따져도 40여년 전에 비해 15배는 넘게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국회의원 세비 인상률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신문 구독료는 물론이고 짜장면보다 높은 인상률이다.
2년 전엔 “수신료는 정치권이 아닌 국민 허락으로 올릴 수 있어”
수신료가 동결돼 있던 동안 KBS 임금과 국회의원 세비가 얼마나 올랐는지보다 중요한 건 박장범 사장이 왜 지금 수신료 얘기를, 그것도 “정치권과 정부” 대응을 탓하면서 꺼냈느냐다.
물론 박 사장은 취임 전부터 ‘수신료 안정화’를 강조해 왔다. 2024년 10월 KBS 이사회의 사장 후보자 면접 때도 “사장이 되면 수신료를 다시 안정화 시키는 데 사장 업무에 절반 이상을 쏟아부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수신료 통합징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6월 경영점검회의 자리에선 수신료를 3000원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뜬금없을 뿐 아니라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방송법에 따르면 수신료 금액을 결정하는 건 KBS 경영진도, 국회도 아닌 KBS 이사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박 사장 스스로 수신료 인상이 시급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사장 후보자 면접 당시 “수신료는 여야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이 올려주겠다고 할 때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할 시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수신료 인상보다는 기존의 요금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걷을 수 있는 구조에 좀 더 주력하겠다”고 했다.
당시는 윤석열 정부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법 시행령 개정만으로 수신료 분리징수를 시행해 KBS의 수신료 수입이 줄어들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당시 박 사장(후보자)은 “수신료 분리징수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효과”가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오히려 이를 긍정적인 것처럼 말했다. 통합징수로 다시 돌릴 의지가 없느냐는 이사 질문에도 “국민의 90% 넘게 분리징수를 찬성하지 않았나? 가장 먼저 행정적인 절차도 필요하지만, 국민들이 ‘분리징수 잘못됐다’, ‘다시 합산해서 과세하자’ 이런 여론을 먼저 만드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장 취임 직후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수신료 분리징수를 통합징수로 되돌리는 방송법 개정안이 다시 추진되자 법안 통과를 적극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4월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엔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KBS 시청자위원 전국대회’ 등 자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1년여가 지나 방송의 날 기념사로 내놓은 메시지가 “45년 동결 수신료…국회의원 세비는 물가상승률 뛰어넘어”인 것이다.
공영방송은 정쟁의 대상 아니다? 무얼 가리킨 말일까
박 사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수신료 문제만 언급한 게 아니라 “그동안 정부의 미디어 정책은 급변하는 콘텐츠 시장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면서 “정부의 지원과 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공영방송을 비롯한 지상파의 위기는 비단 미디어 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공공의 미디어 자산을 방치하고, 낡은 규제로 손발을 묶으며, 공영방송을 정쟁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정치권과 정부에도 그 원인이 있다”면서 “공영방송은 더 이상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박 사장의 이 같은 메시지는 KBS 이사회가 새 KBS 사장 선출 절차를 진행 중인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원이 15명인 KBS 이사회는 8명으로 과반 구성이 되자마자 이사회를 열고 새 사장 선출 관련 논의를 진행해 왔으며, 이르면 이달 중순부터 사장 후보자 공모에 나설 계획이었다. 그런데 박 사장은 8월26일 이사회에서 15명의 이사가 채워질 때까지 사장 선출 절차 진행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고, 거부되자 닷새 뒤 법원에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박 사장은 자신의 임기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사회가 개정 방송법 부칙 등을 근거로 새 사장 선출 절차를 밟는 것이 “정쟁”에 해당한다고 봤을 수 있다.
지금 KBS 사장 선출 논의를 하는 KBS 이사회의 절반은 민주당 추천 이사다. 국민의힘이 자기들 몫 이사 2명을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신료 분리징수를 시행한 것은 국민의힘 정부였고, 다시 통합징수로 되돌리는 법안 처리를 주도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그렇다면 박 사장이 “공영방송을 정쟁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정치권과 정부”를 탓한 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일까. 2년도 안 돼 수신료 인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이유와 함께 듣고 싶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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