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 함정'과 진정한 대국 관계

[이슈 인사이드 | 국제·외교]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14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전 모두 발언에서다. “미·중 양국이 이른바 ‘투키디데스 함정’을 뛰어넘고 대국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이는 역사와 세계, 인민의 질문’이고 ‘미·중 지도자들이 함께 써야 할 시대적 답안’이라고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 시간)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설명을 들으며 함께 걷고 있다. /AP 뉴시스

시 주석은 2015년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투키디데스 함정은 없다”고 말했고, 2024년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투키디데스 함정은 역사적 숙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각각의 발언 맥락과 배경, 그리고 의도 역시 달랐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대외적으로 이렇게 자주 ‘투키디데스 함정’을 언급한 사례도 드물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기존 강대국과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간의 피할 수 없는 대규모 전쟁으로의 길’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2500년 전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존 강대국 스파르타와 신흥 해상 강국 아테네와의 전쟁이 어떻게 그리스 세계 전체를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갔는가를 담담히 써 내려갔다. 그 역시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전해서 추방당하고 망명 생활을 하는 바람에 집필에 몰두하고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게 됐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겐 필독서다. 이 책을 여러 번 통독하지 않고선 국제정치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국제정치의 본질을 혼돈의 ‘아나키 상태’와 ‘권력투쟁의 장’으로 봤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이 투키디데스의 역사적 통찰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결과다. 이 같은 현실주의 계보에 트럼프가 외교·안보 관련 자문을 종종 구했다는 키신저, 그리고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이란 책으로 유명한 미어샤이머 등이 있다. 모두 투키디데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이들’로 볼 수 있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국제정치학에 등장시킨 사람은 하버드대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이다. 미국에서 앨리슨 교수와 인터뷰할 때, 그 자신도 이 용어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될지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다만 앨리슨 교수는 ‘함정’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지도자들이 역사 앞에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다면 ‘숙명’처럼 보이는 강대국 간의 대충돌과 이에 따른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국과 기존 패권국 간의 갈등과 충돌 과정을 상세히 보여줬다. 전쟁으로 이어진 12개의 사례와 함께, 전쟁을 회피한 4개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외교적 상상력과 단호한 의지가 있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도 조언했다. 핵전쟁의 공포가 극에 달했던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이 현명하게도 ‘공포의 균형’을 이뤘던 시기는 그의 분석대로라면 25퍼센트의 확률로 전쟁을 회피한 사례다. 정말 그랬다.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그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핵과 전략무기 감축을 위한 지혜를 모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의 지속가능성은 없을 것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과거 상아탑 속에나 머물던 이 말이 느닷없이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정상 간 만남에서 인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새롭고 신선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연 이 말이 전쟁을 막고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 사용되는가에 의문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용어에 담긴 ‘강대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서로의 영역을 공고히 하자’라는 의도가 담긴 대외적인 수사로만 읽힌다면 정상회담의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본 ‘세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여기에 이란 전쟁까지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3개의 대규모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대국의 지도자들이 서로의 국익을 취하는 무역 관련 협상에서 성과를 냈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소환할 정도라면 인류의 평화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선언적인 합의 정도는 있어야 ‘세기의 회담’을 지켜본 세계인들의 기대감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국제정치학의 또 다른 한 축인 이상주의에서 높이 평가하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대국의 지도자들이 언급하고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그런 세상까지는 꿈꾸지 못했어도, 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나자마자 ‘내가 더 잘했다’라는 식의 의미 없는 국내 정치용 프로파간다를 ‘세계인’들이 기대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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