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서 만난 그 아기는 무사할까?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1)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며

취재를 위한 여행과 사적인 이유에서 선택한 여행 모두가 마찬가지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돈다는 건 새로운 사람과 음식을 마주하는 일에 다름없다. 지난 30여 년. 아시아와 중동, 유럽과 오세아니아를 여행하며 기억에 남을 몇몇 사람을 만났고, 독특한 요리를 맛봤다. 그 여정을 더듬어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편집자주


15년 전, 이란 여행 중 이스파한 이맘광장에서 만난 아기. 훌쩍 자라 이젠 소녀, 아니 숙녀가 되었을까. 무사히, 지내고 있을까.

2011년 봄. 17일간 이란을 여행했다. 튀르키예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이란 북부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쭉 아래로 내려가며 수도인 테헤란과 푸른 지붕의 모스크가 아름다운 이스파한, 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의 암벽 무덤이 지척에 있는 쉬라즈 등을 버스와 기차를 타고 떠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비즈니스가 아닌 여행을 위해 이란을 찾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2주 넘는 기간 동안 내가 만난 한국인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 아니, 동양인 자체가 드물었다. 겨우 중국 여행자 한 명을 만나 함께 점심 한 끼를 먹었던 게 생각난다. 외로웠다.

그럼에도 이란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이색적인 풍광과 건축물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으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요리한 양고기에 곁들인 사프란 섞은 밥도 나쁘지 않았다.

석양을 배경으로 검은색 차도르를 걸친 여성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모스크를 빠져나오는 모습은 초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거대한 산 아래 황무지에 붉게 핀 양귀비꽃은 아름다웠다.

이란 최고의 고대 유적지에서 만난 페르세폴리스의 열주(列柱)는 유럽의 어떤 석조건물보다 미려하고 웅장했으며, 중세 시대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낙타를 묶어두고 하룻밤 묵어가던 카라반 사라이(karavan sarai) 옥상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잠들던 밤은 낭만적이었다.

양고기와 샤프란을 섞은 밥. 낯설지만 싫지 않은 맛이었다.

나는 보지 않고 넘어갔던 드라마 <대장금>과 <주몽>의 인기가 높았던 탓인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드라마 주인공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던 이들도 있었다. “북한에서 왔냐? 남한에서 온 거냐?”라는 질문은 하루에 서너 번씩 들었다. 그 당시 이란엔 북한 군사고문단이 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매혹적인 이슬람 건축물과 쓸쓸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막 풍경, 거기에 더해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 이란은 그렇게 내 가슴과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무슬림들은 그게 누구이건 자신의 곁으로 온 사람을 ‘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있다. 테헤란 관공서 벽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슬림은 형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알다시피 이란 국민의 절대다수는 시아파 무슬림이다. 나는 무슬림이 아님에도 이란 사람들에게 형제와 유사한 대접을 여러 번 받았다.

개인적 체험을 보편화시키기엔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란을 여행하며 겪은 내 경험만을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이란 사람들의 순수함과 이타심은 별스러운 데가 있다.

이란은 외국인이 묵어갈 수 있는 숙소가 한정적이다. 거리엔 당연지사 한국어가 한 글자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영어로 쓴 간판도 거의 없다.

테헤란 지하철역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성이는 나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면서까지 숙소 앞까지 안내해 준 ‘알리’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 남성의 친절함을 잊지 못한다.

출근까지 미루며 어려움에 처한 여행자를 돕는 태도. 알리와 악수를 하며 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형제애’가 어떤 것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스파한 이맘광장에서 만난 푸른 옷의 여자 아기.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그 꼬마의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도 15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선연하다.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 삼촌들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한 나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오래 바라보던 귀여운 아기.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뻐서 아기 엄마의 허락을 받고 사진까지 찍었다.

이란 최고의 고대 유적지에서 만난 페르세폴리스의 열주. 전쟁의 포화를 피하고 살아남았을까.

얼마 전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했다. 초등학교에 폭탄이 떨어져 200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죽었다는 뉴스를 TV 화면을 통해 보며 이스파한의 그 아기를 떠올렸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아직 진행형이고, 이란 도시 곳곳에 쏟아질 미군의 포탄엔 눈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쟁과는 무관한 아이들을 피해 가지 못한다. 비극은 가능성만으로도 인간에게 공포를 준다.

나는 신(神)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 밤엔 이런 기도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테헤란의 착한 노동자 알리와 지금은 훌쩍 자랐을 이스파한의 꼬마 숙녀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무사하기를. 꼭 그러하기를.”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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