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2시 광주고등법원 203호. 40석 남짓한 방청석을 가득 메운 사람의 대부분은 검은 외투 차림의 남성이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방청석이 모자라 선 채로 재판정에 들어온 사람도 상당했다. 재판 결과를 듣기 위해 전국 섬에서 광주로 모여든 공공운수노조 발전노조 도서전력지부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숨을 죽인 채 법관석을 지켜봤고, 기도하듯 손을 모으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재판관 3명이 착석한 뒤 재판장이 “항소를 기각한다”는 주문을 읽자, 짧은 탄식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소장을 낸 지 6년, 1심 선고 후 2년6개월, 해고 통보를 받은 지 1년6개월만에 섬 발전노동자들은 다시 한전의 불법파견을 법원에서 확인받았다.
도서발전 노동자들은 짧게는 4년, 길게는 32년간 전국 66개 섬에서 발전·배전시설을 관리해 왔다. 이들은 한전 퇴직자들이 100% 출자한 JBC(제이비씨) 소속으로 일했다. 한전은 1996년부터 JBC와 수의계약으로 도서지역 전력공급 사업을 위탁해 왔다. 여러 차례 국정감사나 언론을 통해 ‘일감 몰아주기’, ‘퇴직자단체를 향한 특혜’라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시정되지는 않았다.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는.
이들은 2020년 한전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한전 직원은 JBC 직원에게 직접 업무를 지시하고 보고도 받았다. JBC 노동자들은 한전이 만든 매뉴얼과 규정에 따라 일했고, 이들이 관리하는 설비는 한전 소유였다. 출장이나 지역 봉사활동을 할 때도 한전 직원과 JBC 직원들은 함께했다. 광주지법은 2023년 6월 한전과 JBC, 노동자 간 근로자 파견 관계를 인정하고, 한전에 직접고용을 명령했다.
그런데 한전은 항소 이후 이들을 본사가 아닌 자회사 한전MCS로 보내려 했고, 소송 취하를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동시에 JBC와 수의계약을 해지했다. 수익 기반을 잃은 JBC는 2024년 8월 노동자 180여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해고 14개월 뒤 조사에서 이들 중 41.1%가 실업 상태였고, 75%는 알콜 의존 위험군, 57%는 우울증, 49.7%가 수면장애, 29.1%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호소했다. 대부분 섬 출신인 이들은 일자리를 찾기도, 삶의 터전을 떠나지도 못한 채 지난 시간을 견뎌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공공기관·공기업의 모범 사용자 책무를 강조해 왔다. 한전은 30년 가까이 이들을 불법으로 고용해 왔고, 이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았다. 이들은 연평도·백령도 같은 군사적 요충지에서 발전소를 지켜왔고, 실제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도 발전소를 지킬 만큼 공공노동자로서 책무를 다해왔다. 이제 법원의 불법파견이 거듭 확인된 만큼, 한전은 사용자 책임과 공공기관 책무를 외면하지 말고 상고 아닌 직접고용으로 응답해야 한다.
숙련자들이 해고된 뒤 정전 복구 시간은 크게 늘었지만, 몇몇 지역 언론을 제외하곤 이들을 살피는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기자회견에서 만난 한 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10초, 1분 동안 정전이 된다면 기사가 참 많이 났겠죠, 기자님. 섬은 우리가 해고된 뒤 정전이 많이 늘었습니다. 섬사람 얘기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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