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여간 정든 파리를 떠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지난해 12월29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제각각 다른 표정의 승객들 사이에 정철환 기자가 있었다. 2021년 11월부터 파리에 주재하며 조선일보 유럽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4년 2개월 만에 귀임하는 길이었다. 서울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OZ502편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그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묻자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서울로 돌아가 어떤 기자로 살아야 할지,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내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4년여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모로코 대지진,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 등 전쟁과 자연재해 현장을 10여 차례 취재했다.
화약 냄새가 나고, 공습경보가 울리고, 폭발음이 들리고, 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며칠째 굶은 여인들이 울면서 서성이고, 매일매일 장례식이 열리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한반도에서 7000km 떨어진 전쟁터에 내몰려 생포된 북한군 청년 2명을 포로수용소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어떤 기자도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도 마주할 가능성이 희박한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정 기자는 8일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냈다.
◇무턱대고 뛰어든 북한군 포로 인터뷰
지난해 1월 말, 정 기자는 파리에서 15시간을 달려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 플랫폼에 내렸다. 전쟁 중 5번째 방문이었다. 이전 방문과 달리 정 기자의 캐리어엔 라면과 초코파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한 달 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북한군 포로 2명의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길이 안 보이는 취재가 시작됐다.
“되든 안 되든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이역만리 남의 전쟁터에 끌려온 같은 동포 청년들의 사연을 한국 언론이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북한군 파병 관련 기사를 계속 외신 보도에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다른 나라도 아닌 북한군 포로에 대한 취재만큼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선우정 당시 편집국장과 김신영 국제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된다’는 보증 없이 무턱대고 뛰어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를 4번 방문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쌓은 현지 네트워크는 뒷배였다. 파리에서 우크라이나 취재원들을 접촉하며 이메일·메시지·전화 등 60여통을 돌렸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인사는 처음엔 문자를 반갑게 받더니 용건을 밝히자 연락을 끊었다.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를 인터뷰하러 1박2일 일정으로 스위스 다보스 포럼을 찾았을 때 만난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인사는 “이미 여러 매체가 줄을 서 있다”고 했다.
실망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응답이 왔다. “내가 담당자를 안다.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정부 차관급 인사의 메시지였다. 그는 “깜깜했던 눈앞에 멀리 작은 촛불 하나가 보이는 듯 했다”고 표현했다. 국제부장에게 보고하고, 서둘러 외교부에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신청했다. 1월 말 우크라이나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찾은 키이우는 거의 매일 반복되는 공습에 어수선했다.
그는 키이우에서 북한군 포로 문제에 가까운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들을 소개받고 만나러 다녔다. 그 과정에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BBC, 르몽드, AFP 등이 북한군 포로 인터뷰를 추진 중이란 말도 들었다. 열흘 가까이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포기하려는 즈음 우크라이나 군 쪽을 알아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어렵사리 키이우 외곽 군시설 벙커에서 군 최고위인사와 마주했다.
그는 대화 과정에서 북한군 파병에 대한 한국 내 여론을 물었다. 정 기자는 한국 내 여러 정치적 상황과 소셜미디어 등에 쏟아지는 음모론 등을 설명하며 “한국에선 북한군 파병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답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갑자기 부관을 부르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정 기자에게 “직접 포로를 만나보겠느냐, 연락을 줄 테니 좀 기다려 보라”고 말했다.
정 기자는 “북한군 포로 취재는 우크라이나 정부 내 핵심 인사 몇 명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며 “그곳을 뚫으려고 매체 간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고 했다. 그는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정부 내부적으로 부처 간 경쟁, 의사 결정의 혼선이 있었고, 그 부분을 운 좋게 파악해 풀어낸 게 취재 기회로 이어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복도 끝방
북한군 포로와의 만남은 이틀 후에 성사됐다. 키이우 중앙역에 있는 호텔에서 포로수용소까지는 택시로 약 40분 거리였다. 영하 10도 추위에도 이미 10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러시아군 용병 포로 면회를 온 스위스 적십자 활동가들이었다. 정 기자의 눈에 그들이 들고 온 담배 꾸러미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 담배를 빼먹었구나….’
전쟁 전 군 교도소였다는 포로수용소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복도가 꼬불꼬불 이어졌다. 철문이 철커덕 열리길 네댓 번, 웃통을 벗은 러시아군 포로들이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를 헤치며 복도를 지났다. 동행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복도 끝에 멈춰 문을 열었다. 누워 있던 북한군 청년은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누구십네까?”
“서울에서 온 기자입니다.”
“근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네까?”
“막상 만나니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붙잡혀 영상과 사진이 공개됐을 때 비해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마주하니 너무나 큰 고생을 한 티가 역력해 마음이 쥐어짜듯 아팠습니다.” 그는 “기자로서 준비한 질문보다 같은 동포 입장에서, 아버지 입장에서 나오는 질문이 우선이었다”면서 “‘어쩌다 이 먼 땅까지 끌려와서 이런 신세가 됐나’, ‘이 청년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 ‘도대체 무슨 운명으로 나와 이런 엄혹한 곳에 마주 앉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군 포로 2명은 각각 독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나 건너 옆방에 수용돼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정 기자는 두 사람과 각각 인터뷰를 했다. 영상 촬영 양해를 구하고 관물대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찍다가 손에 들고 찍기도 했다. 낯선 기자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도 두 청년은 말문을 열었다. 슬며시 잡아본 손은 나무껍질처럼 거치고, 온통 굳은살에 곳곳이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정 기자는 “그들의 부모가 나와 한 살 차이 동년배라는 얘길 듣고, 인터뷰 내내 부모의 심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했다. “담배 한 대를 건네지 못한 게 제일 마음이 아팠어요. 부상의 통증, 곁에서 죽어 간 동료들의 모습, 부모에 대한 그리움 등이 밤마다 엄습해 올 텐데, 담배가 얼마나 피우고 싶었겠어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기사 작성에 들어갔지만 쉽지 않았다. 음성을 텍스트로 바꿔주는 네이버 인공지능 서비스 클로바노트는 북한군 병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대화 내용 전체를 옮기는 데 시간이 걸렸다. 턱에 총상을 입고 회복 중인 포로의 발음은 잘 들리지 않는 구간이 많았다. 영상 녹음을 여러 차례 반복해 들으며 확인해야 했다. 녹취를 풀고, 기사를 쓰고 다듬고, 영상에서 사용할 만한 부분을 선별해 편집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북한군 병사 2명과 인터뷰에서 있었던 일들은 지난해 2월19일 <“북에서 포로는 변절, 한국 가고 싶다” 전장서 붙잡힌 북한군 인터뷰> 기사를 시작으로 사흘간 조선일보 지면과 인터넷을 타고 나갔다.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는 사실을 세계 언론 최초로 북한군 포로의 입을 통해 확인한 보도다. 전 세계 30여개국 주요 언론이 인용했다. 그는 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025년 3월), 관훈언론상(2025년 12월)을 받았다.
◇외신 받아쓰지 않고 현장으로
2002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조선일보로 옮겨 올해로 25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지만, IT(정보기술) 쪽에 관심이 많아 졸업 후 한국통신 하이텔에서 2년쯤 근무하다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IT 기업에서 일한 경험을 인정받아 주로 경제부와 산업부에서 일했다. 학창 시절 유럽 정치사와 근대 정치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21년 유럽 특파원에 선발됐다.
언론사에서 특파원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또한 한 차례 탈락했다가 두 번째 시도 끝에 선발됐다. 영어로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어느 정도 구사가 가능하도록 공부했고, 2016년 프랑스 리옹에서 1년간 연수하며 유럽 각국의 제도와 환경을 경험한 게 유럽 특파원이라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그는 “특파원을 해보니 힘든 일이 많았다”면서 서울에서와 달리 혼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를 커버하고, 많은 것을 잘 해내기를 기대받고, 언론 환경 변화로 요구받는 일도 크게 늘었다고 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중동 분쟁, 모로코 대지진 등 유럽 지역에서 굵직한 뉴스가 잇따랐다. 늘 바쁘고, 부담감을 느꼈지만, 취재 원칙은 있었다. 무턱댄 외신 받아쓰기 취재, 현장과 유리된 논평식 취재는 벗어나자고 애를 썼다.
러시아 침공 직전인 2022년 1월 키이우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를 총 6번 방문해 60일 이상 체류했다. 아프리카 오지, 모로코 아틀라스산맥의 산골 마을, 튀르키예와 시리아 접경 지역, 몰도바 내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을 한국 언론 최초로 찾아 취재했다. “이거는 강조하고 싶은데 현장 취재에 돈 안 아껴요. 조선일보 오너의 고집이 있으니 가능한 거죠. 계산해 봤는데, 4년간 출장비로만 수천만원을 썼어요.”
◇AK 소총 든 러시아군이 몸수색
다행히도 매번 몸성히 돌아왔지만, 위험한 고비도 적잖이 있었다. 2022년 4월 트란스니스트리아 검문소를 통과할 때 AK 소총을 든 러시아군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려다 발각돼 초소로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한 2023년 10월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을 취재하려다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경찰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선 공습경보와 폭발음을 들으며 취재해야 했다. 한번은 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드론이 폭발했는데, CNN을 통해 그 장면을 본 회사에서 괜찮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처참한 지진 현장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2023년 9월 대지진으로 파괴된 모로코의 한 산골을 찾았다. 주민 3분의 1이 죽거나 다쳤지만 구조 인력과 구호 물품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너진 집들의 잔해 주변에서 며칠째 굶주린 채 서성이는 여인들, 지치고 공허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노인들을 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취재 이전에 인간적 도움을 주고 싶은데, 당장 마감부터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현장에서 해외 유력 매체 기자들과 경쟁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했다. 무엇보다 글로벌 매체의 취재 인력과 인프라가 부러웠다. 대륙별로 한두 명이 전담하고, 도착하자마자 모든 사안을 커버하며 매일 같이 기사를 내놔야 하는 한국 특파원들과 달랐다. 글로벌 매체는 국제 정치·경제에 전문성이 있고, 해당 지역 언어와 문화에 밝은 기자를 국가·지역별로 부족하지 않게 보내 충분히 취재하고 인맥을 쌓을 수 있게 한다.
“키이우에서 보니 BBC나 뉴욕타임스 같은 글로벌 매체는 지국 사무실을 방공호가 갖춰진 빌딩에 두고, 통역을 지원하고, 돈바스 등 전쟁 지역에 갈 때는 안전팀도 따로 붙여주더군요. 한국은 경제 규모나 위상이 미국·유럽과 나란히 하는데, 언론 환경은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한국 언론은 유능한 인재를 얻기도, 육성하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해 현장 취재에 공을 들일 수 있는 시간적·물질적 여유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25년차 기자는 부끄럽게도 기자의 소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사라진 현장”, “폐허 위에 남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현장”이 문득문득 생각나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세상도 다르게 보게 되고요. 예전 같이 기자 생활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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