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봐주기식 기사 지우기, 언론 신뢰도 지워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권력을 위한 기사 삭제는 언론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권력을 감시할 언론의 직무를 유기하는 행위이자 언론의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처사다. 권력자에게만 기사 삭제의 특혜를 준다는 것은 ‘공정 보도’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토록 위험한 행위가 언론계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는 사실이 지난 연말 뒤늦게 밝혀졌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남이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를 내 벌금 9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는 2021년 8~10월 보도가 약 4년 뒤인 지난해 9~10월 무더기로 사라지거나 수정된 것이다. 해당 사안은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가 자사의 기사 삭제 사실을 알린 성명을 내면서 공론화됐고, 10여곳 매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내부 조사로 확인됐다. 남몰래 기사를 지워버린 매체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태의 가장 뼈아픈 지점은 대다수 언론사가 외부 압력에 큰 저항 없이 기사 삭제 및 수정을 수용했다는 데 있다. 언론 경영의 현실과 광고주와 관계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자사 보도의 공익적 가치보다는 광고주의 요청을 우선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해당 보도를 작성한 기자의 동의를 받는다거나 보도 책임자와 논의하는 일조차 없었다는 건 특히 충격적이다. 언론사 스스로가 자사 기사의 가치를 경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독자의 신뢰를 요구할 것인가. 언론의 독립된 편집권을 외부에서 흔들려 한 시도가 상당수 언론사에서 통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 권력이 얼마나 쉽게 언론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많은 언론사가 기사 삭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번 사태로 드러났다. 일각에서 현대차의 요청을 들어줄 명분으로 ‘잊힐 권리’를 거론했는데 4년이 지난 범죄로 오래 고통받은 개인을 고려했다는 취지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기한과 음주 운전이라는 범죄의 종류 모두 잊힐 권리의 기준으로 설득력이 낮다. 게다가 잊힐 권리는 개인 정보 보호와 공익의 균형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모든 경우에 무조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재벌 후계자의 음주 운전은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는 면에서 공익적 사안에 가깝다는 평가다.


이번 사태는 사측의 사과와 삭제·수정된 뉴스를 되살리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다만 뉴스 소비가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고 많은 언론사가 경영난으로 자본 권력에 취약해진 오늘날 이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각 언론사가 단순한 사과를 넘어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우선 기사 삭제에 대한 원칙과 프로세스 정립을 고민해 볼 수 있겠다. 예컨대 ‘역사의 기록’이라는 언론의 의무를 다하려면 기사의 완전한 삭제보다는 삭제 이유를 게재하거나 ‘당사자 요청으로 삭제됐다’는 흔적을 남기는 방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삭제 기준을 공개하고 분기별 삭제 기사 목록을 공개하는 등 투명한 절차도 필수다.


제도적 장치가 있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언론사의 의지다. 원칙 없는 기사 삭제는 언론의 기록 기능을 훼손하는 동시에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다. 언론사 스스로 자사의 기사를 함부로 지운다면 누구도 언론을 역사의 기록자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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