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기사 삭제·수정' 후폭풍… 한겨레 대표이사 사의

[언론노조 조사… 최소 11개사 확인]
정의선 회장 아들 음주운전 보도
기자와 논의 없이 4년 만에 조치
일부 언론사는 여전히 묵묵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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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아들의 음주운전 사고를 보도한 언론사들이 4년 만에 기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다수 언론사는 긴급 공정방송위원회, 공정보도위원회 등을 열고 기사 복구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약속했지만 일부 언론사는 여전히 침묵 중이다. 한겨레신문에선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표이사가 사의를 밝힌 것은 물론 편집인과 광고·사업본부장, 뉴스룸국장, 디지털부국장이 보직에서 물러났다.

2021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아들의 음주운전 사고를 보도한 언론사들이 4년 만에 기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문제제기로 원상 복구됐지만, 수정된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기사들도 있다.

앞서 정의선 회장의 장남 A씨는 2021년 7월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같은 해 9월 법원은 A씨에게 벌금 9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고, 당시 다수 언론사는 이를 보도했다. 그런데 약 4년 뒤인 올해 9~10월 관련 기사들 제목이 돌연 수정되거나 기사 전체가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는 뉴시스, 세계일보, 연합뉴스TV, SBS, YTN 5곳, 기사 제목을 수정한 언론사는 뉴스1, 서울신문, 연합뉴스, 한겨레, 한국일보, CBS 등 6곳이었다. 이들은 적게는 1개에서 많게는 3개까지 기사를 삭제했고, ‘현대차’를 ‘H그룹’, ‘대기업’으로 익명화하거나 정의선 이름을 빼고 ‘장남’을 ‘자녀’로 바꾸는 식으로 기사 제목을 수정했다. 김도원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이 외에도 기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한 언론사는 더 많을 것”이라며 “언론노조 소속이 아니라 확인은 못 했지만 기사 삭제가 강하게 의심되는 언론사들이 몇 군데 더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 언론사들은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아무런 협의 없이 기사 삭제·수정을 강행했다. 세계일보와 CBS 정도만 취재기자에게 관련 내용을 공유하고 허락을 맡았을 뿐, 대부분 데스크 선에서 일방적인 삭제·수정이 이뤄졌다. 특히 일부 언론사는 출고 부서와의 협의 없이 마케팅부, 디지털부 차원에서 기사를 삭제해 충격을 안겼다. YTN은 기사 작성 당시 담당 부장이었던 마케팅국장이 당시 보도국장이었던 사업본부장에게만 보고하고 기사 2건을 삭제했다. 이 과정에서 취재기자는 물론 현 취재부서장, 보도국장조차 기사 삭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SBS 역시 디지털 출고 기사였다는 이유로 출고 부서와 협의 없이 디지털부 내에서 3건의 기사 삭제가 이뤄졌다.


기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언론노조 SBS본부는 12월23일 성명을 내고 “재벌 광고주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기사를 지워줬을까”라며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언론노조 연합뉴스지부도 12월26일 공정보도위를 통해 관련 책임자들의 공식 사과 및 전수 조사, 시스템 마련 등을 요구했다.


한겨레는 특히 노조 성명뿐만 아니라 기수별 성명, 기사 제목이 수정된 기자들의 기명 성명까지 나오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당시 관련 기사를 썼던 천호성 한겨레 기자는 “제가 한겨레를 일터로 택한 건 ‘기사를 회사 이권과 바꿔먹지 않을 유일한 매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며 “하지만 이번 일로 믿음이 많이 무너진다”고 우려했다. 장예지 한겨레 기자도 “모든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던 점이 쓰라린다”며 “임원진과 국장단은 책임 있는 자세로 응하라”고 촉구했다.


언론사 경영진과 보도 책임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심인성 연합뉴스 편집총국장은 12월29일 편집회의에서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사전 상의나 협의 없이 수정 조치를 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명백히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한겨레도 대표이사와 편집인, 광고·사업본부장이 4일 사과 메일을 보낸 데 이어 5일 이주현 뉴스룸국장과 김수헌 디지털부국장이 보직에서 사퇴했다. 등기이사인 최우성 대표이사, 김영희 편집인 겸 미디어본부장, 안재승 광고·사업본부장 역시 보직 사퇴 및 등기이사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최우성 사장의 경우 향후 주주총회 일정 등을 고려해 조만간 치러질 차기 대표이사 선거 때까지 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언론사들은 삭제하거나 수정한 기사도 서둘러 원상 복구했다. SBS와 연합뉴스TV는 삭제한 기사를 모두 복구했고, 한겨레와 한국일보, 연합뉴스도 수정한 제목을 되돌렸다. 이 과정에서 연합뉴스TV는 기사 상단에 재송고 안내 문구를, 한국일보는 ‘신중하지 못한 판단으로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끼쳐드려 유감을 표합니다’라는 사과 문구를 덧붙였다. 반면 YTN과 서울신문, 뉴스1 등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4개 중 3개를 삭제하고 1개는 제목을 수정했던 뉴시스의 경우 제목은 원래대로 되돌렸지만 삭제한 기사는 복구하지 않았다.


한편 일부 언론사는 재발 방지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SBS는 12월24일 긴급 보도편성위 이후 출고 부서와의 협의 의무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 중이다. 뉴시스도 5일 공정보도편집위원회에서 공동보고서를 채택하고 ‘유사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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