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영남에 맛있는 요리가 있어?” 때론 이런 말도 덧붙인다. “거긴 한국에서 제일 먹을 게 없는 도시들이야.” 과연 그럴까? 호남에서 4년, 서울에서 18년, 나머지 시간을 영남에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말하고 싶은 열망에 몸이 들썩거린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은 그런 이유에서 발원한 졸고다. [편집자 주]
몇 해 전 초겨울이다. 가수 진성이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고 노래한 ‘안동역’ 인근 조그만 식당에 갔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고, 무언가 따끈한 게 먹고 싶었다.
‘냄비밥’이란 메뉴가 눈에 띄었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는데, 거긴 이미 나 외엔 알 만한 사람이 다 아는 맛집이었다. 운이 좋았다. 다른 메뉴를 쳐다볼 것도 없이 냄비밥을 주문했다.
기대했던 대단한 밥상이 차려지진 않았다. 그저 몇 가지 나물 반찬에 담백하게 끓인 된장찌개, 거기에 고등어조림 한 토막. 한데, 얇은 냄비에 갓 지어낸 밥이 기가 막혔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구수하고 달았다.
교주 최시형을 따르던 동학교도들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다. 거창한 의미 따위를 붙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밥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뿐인가?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이 없었다.
싱싱한 푸성귀 무침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따끈한 냄비밥을 깨끗하게 비운 그날. 냄비에 지은 밥이 선물한 ‘또 다른 별식’ 누룽지를 씹으며 기억의 회로 저 먼 곳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선친과 외조모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주전부리나 별식 따위가 없던 시절엔 반찬도 부실했다. 그래서였을 터다. 지난 세기 한국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식이라 할 밥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단다.
물론 제 땅이 없고, 소작할 땅도 마땅찮아 극도로 가난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리와 콩 등 잡곡을 섞은 밥도 양껏 먹지 못했겠지만.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식사량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고 한다.
‘밥을 무지막지하게 먹는 조선 사람’에 대한 놀라움은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쓴 책에 고스란히 남았다. 커다란 밥그릇을 앞에 놓고 앉은 상투 튼 조선인 사진 몇 장도 함께 전해진다.
1947년에 태어난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에 살았다. 반면 선친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세련된 도회지’라 불러도 좋을 일본 나고야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해방 한 해 전에 부산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혼인하기까지 내내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일생 소식(小食)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기 주먹만한 조그만 밥그릇임에도.
그런 아버지가 장가를 갔다.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몹시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선친의 첫 번째 처갓집행(行)은 1970년 가을. 그때만 해도 사위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니 저녁밥 먹을 때가 됐다. 장모가 들고 온 밥상을 본 아버지는 대경실색(大驚失色) 했단다.
소의 머리통만한 밥그릇엔 푸른 염료로 큼직하게 ‘福(복)’자가 새겨져 있었고, 밥그릇에서 솟아오른 밥의 높이가 족히 10cm는 돼 보였다는 것. 이른바 농사짓는 상일꾼이 먹는 ‘고봉밥’이었다.
선친은 매사에 과장이 없는 사람. “쌀 한 되로 밥 한 그릇을 만든 형국이군”이란 혼잣말을 참지 못하고 했다는데, 그걸 장모는 듣지 못했을까? 만약 들었다면 꽤 서운했을 듯하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밥을 아버지는 결국 남겼고….
세월무상(歲月無常)이다. 지난 2007년. 산처럼 높고 높은 고봉밥을 퍼주던 1920년생 외조모(아버지의 장모)가 세상을 떴고, 이듬해 시골 사람들 밥그릇 크기와 밥의 양에 경악했던 사위(선친)도 귀천했다.
그리고 오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믿던 1970년에서부터 55년이 흘렀다. 이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밥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나와 엄마도 겨우 쌀 한 홉으로 밥을 지어 둘이서 나눠 먹는다. 그러고도 그걸 남길 정도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고 싶어진다. 외조모의 가마솥 고봉밥이나 낡은 냄비에 고슬고슬 지은 밥이. 그런 걸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 모양이다.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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