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영남에 맛있는 요리가 있어?” 때론 이런 말도 덧붙인다. “거긴 한국에서 제일 먹을 게 없는 도시들이야.” 과연 그럴까? 호남에서 4년, 서울에서 18년, 나머지 시간을 영남에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말하고 싶은 열망에 몸이 들썩거린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은 그런 이유에서 발원한 졸고다. [편집자 주]
오미자(五味子)를 재료로 만든 술을 처음 맛본 건 20대 초반 때다.
내 엄마를 대신해 생일상을 차려줄 정도로 터무니없이 날 귀여워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곱상하고 귀티 나는 외모에 한식에서부터 양식, 일식까지 무엇이건 능수능란하게 차려내는 수준급 요리사이기도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50대 중반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인박명(才人薄命). 다시 한번 그녀의 명복을 빈다.
어쨌건 그 친구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1990년대 초반이다. 구멍가게에서 사 간 맥주 한 박스를 다 비우고도 술이 모자랐던 우리는 주방 선반에서 매혹적인 빛깔을 뽐내는 담금주 한 병을 발견했다.
조그맣고 새빨간 열매가 독한 소주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망설일 것 있나? 주인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뚜껑부터 열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자다가 일어난 친구 어머니가 “아이고, 이놈들. 결국은 약에 쓰려고 만든 오미자주까지 너희들이 먹는구나. 그래 잘했다. 젊으니 한 말 술인들 못 마실까”라며 사람 좋게 웃어줬다.
나와 친구도 도도한 취기 속에서 따라 웃었다. 새벽까지 통음한 그날 밤이 벌써 30년도 더 된 옛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오미자의 이름이 어째서 ‘오미자’인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미자나무는 바위가 많은 산에서 자라는 덩굴성식물이다. 바로 여기서 열리는 열매가 오미자. 색깔은 다르지만 포도와 유사한 모양이기에 ‘붉은 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열매엔 달고, 쓰고, 시고, 맵고, 짠맛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다.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열매’라는 뜻에서 온 작명이 바로 오미자인 것.
한자를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터. 헌데,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감지해 내는 절대미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은 오미자나무를 재배했고, 그 열매를 따서 술을 담고, 차(茶)도 만들고, 설탕이나 꿀을 섞어 발효시킨 후 청으로도 먹었다.
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를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에선 오미자의 효능에 관해 ‘쇠진한 몸을 완화시키고, 눈을 밝게 해주며, 신장을 데워준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정기를 높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30여 년 전 친구 어머니가 “약에 쓰려고 담근 술”이라 말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주려고 정성껏 만들었을 귀한 술을 아들도 아닌, 아들 친구가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마셔 버렸으니 마음 속으론 내가 밉지 않았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대목에선 용서를 구한다.
경상북도 문경은 이름난 오미자 생산지다. 오미자 열매는 초여름에 열리는데 그 시기에 맞춰 뻑적지근할 정도로 성대한 축제가 해마다 펼쳐진다. 취재를 위해 그 계절에 맞춰 두어 번 문경을 찾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문경 오미자 축제에 간 게 아마 7~8년 전쯤인 듯하다. 그곳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돼지불백 식당에 들렀다. 동료들과 함께였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구워주는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맛은 유별났다. 잡내가 없었고 육질은 부드러웠다. 돼지고기 특유의 부들부들한 식감과 불에 익힌 단백질의 고소함, 과하지 않은 매운맛과 단맛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것.
기자들 서너 명의 논쟁이 시작됐다. “이건 돼지고기를 양념할 때 오미자청을 넣은 게 틀림없어” “아냐. 고추장을 만들 때부터 오마자를 재료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운운하는.
정신없이 바쁜 식당 주인에게 “누구 말이 맞습니까?”라고 물어보기엔 미안했다. 사실 먹음직한 돼지불고기를 안주 삼아 오미자가 들어갔다는 예쁜(?) 핑크색 막걸리를 들이켜기에도 바빴고.
때마다 문경을 다녀올 때면 오미자청, 오미자차, 오미자 열매를 구입하곤 한다. 내 엄마는 오미자차를 즐겨 마셨고, 오미자청은 이런저런 볶음 요리의 재료로 사용했다.
지난해엔 오미자주도 만들었는데, 엄마 집 거실에서 붉게 익어가는 그걸 다가오는 설에 마실 생각이다. 스물두어 살 때 친구 집에서 마셨던 그 맛일까? 궁금하네.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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