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그 순간 광주 언론인들은 44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1980년 5월18일,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았던 슬픈 기억이다. 당시 언론은 신군부의 보도 통제로 5·18의 참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광주MBC에 불을 지르고 참다못한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 기자들이 절필 선언까지 했지만 계엄군의 만행은 한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계엄 땐 달랐다. 광주일보와 무등일보가 호외<사진>를 발행하며 재빨리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류성훈 무등일보 편집국장은 “선배들로부터 언론 통제에 대한 이야길 들어왔기에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당장 우리 회사로 계엄군이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당시 호외 제작을 위해 회사 출입구부터 봉쇄했던 기억이 난다. 광주에서 유일하게 윤전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최대한 빨리 호외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말했다.
12월3일 밤, 광주일보와 무등일보 편집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단체 채팅방에 상황이 공유되며 대부분의 기자들이 회사로 들어왔고 다들 열정적으로 호외 제작에 참여했다. 최권일 광주일보 편집국장은 “마지막 신문 제작일 수 있으니 최대한 신경 써서 빨리 마감하자고 기자들을 독려했다”며 “광주에선 기자들에게 5·18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모두 계엄이 갖는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실제 기사에 이름을 넣을지 말지 논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사의 기록자로 남기 위해 기명기사로 호외를 채웠다”고 말했다.
광주일보는 당시 밤 11시부터 제작에 들어가 자정 무렵 1차 마감을 끝냈다. 이후 국회 표결 결과를 기다리며 제목 등을 수정, 오전 12시30분 즈음 호외 1만5000부를 찍어냈다. 무등일보도 비상계엄 발령과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소식을 담아 2~3시간 만에 호외를 제작했다. 호외 발행은 1988년 무등일보 창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류성훈 국장은 “제작한 호외는 기자들이 직접 들고 가 광주공항, 광주고속버스터미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배치했다”며 “무등일보는 그 후 2번의 호외를 더 발행했다. 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호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신문에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SNS에 사진을 올리며 두 신문사의 호외는 이른 새벽에도 큰 관심을 모았다. 최권일 국장은 “송정역에 뿌려진 호외를 누군가 X(옛 트위터)에 올리며 순식간에 확산됐다”며 “며칠 뒤 요미우리신문, 주니치신문,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취재가 왔다. ‘남은 호외 있냐’며 한동안 학생부터 노인까지 편집국을 찾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12월3일 이후 두 언론사는 계엄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지역 신문인만큼 다룰 수 있는 정보의 한계도 존재했지만 광주 언론만이 다룰 수 있는 관점으로 관련 뉴스를 보도해왔다. 최권일 국장은 “계엄 이후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5·18 역사 왜곡과 폄훼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며 “이미 5·18 특별법과 판결 등으로 다 정리됐던 것들이다. 조만간 계엄 1주년 기획을 통해 이런 세력들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 밤은 광주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류성훈 국장은 그 차이를 만든 원인을 ‘정보 통제’에서 찾았다. 류 국장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 계엄군을 막은 건 1980년이나 2024년이나 같았다”며 “차이가 있다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국민들이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회에서 치열하게 현장을 전달한 기자들, 그들이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기에 2024년의 계엄은 실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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