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2024년 12월3일 밤, 느닷없는 대통령의 말을 대부분의 기자들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가짜 영상이겠지’, ‘그냥 수사적 표현일 거야’ 잠시 생각한 기자들은 이내 현실을 깨닫고 현장으로 내달렸다. 마포대교를 뛰어 건너고 국회 담을 넘으며 가능한 한 빨리 국회로, 기자실로, 뉴스룸으로 향했다. 때마침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포고령이 발표됐다. 취재하다 체포될 수 있을 거라는 공포가 피어올랐지만 그렇다고 발걸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취재했던 그 밤의 기록, 기자들의 이야기를 1년이 지난 지금 재구성해본다.
◇마포대교를 달리고 담을 넘어 국회로
3일 밤 10시45분, 국회의사당 중앙 로비인 로텐더홀엔 조다운 연합뉴스 기자가 홀로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15분 전만 해도 그는 마포에서 동료들과 저녁 겸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야간 모니터링 당번이라 대통령의 긴급 담화 방송을 켜놓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비상계엄을 선포한단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실감이 안 나 선배에게 웃으며 보고하는데, 선배가 정색하며 말했다. “바로 국회로 뛰어가라.” 조 기자는 계엄 선포 2분도 안 돼 식당을 뛰쳐나갔다. 그날따라 택시가 잡히지도 않아 마포대교를 뛰다시피 건넜다. 여의도 초입에서야 겨우 빈 택시를 잡아 서둘러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이 국회 정문을 막기 한참 전이었다.
“대통령 담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 국회에 들어갔거든요. 그러니 제가 로텐더홀에 도착한 첫 기자였어요.” 당시만 해도 로텐더홀엔 야간 근무하는 방호과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직원들의 질문에 서둘러 속보와 포고령을 확인한 조 기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계엄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조금 있으니 헬기가 온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본청 창문을 보는데 진짜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어요. 처음엔 그걸 보고도 못 믿었어요. 지나가는 헬기인 줄로만 알았어요.”
밤 11시40분, 국회 상공엔 다수의 국군 헬기가 도착하고 있었다. 국회 담을 넘어 소통관으로 달려가던 나병욱 KBC광주방송 영상기자는 그 중 3대가 국회 운동장에 내려앉는 모습을 목격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는 엄청났다. 그 굉음에 순간 공포심이 일었지만 현장을 기록해야 했다. 나 기자는 휴대전화 녹화 버튼을 누르고 한 발 한 발 운동장 쪽으로 나아갔다. 헬기에서 내린 군인들은 이열 종대로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저는 광주에서 나고 자라 어렸을 때부터 5·18 계엄군에 대해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군인들이 총부리로 저를 해코지하면 어쩌지 그 생각부터 들었어요.”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촬영을 이어갔다. 그 때, 군인들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국회 본청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던 것이다. “5m, 3m, 1m… 이렇게 점점 가까워지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순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어요. 설마 인사하는데 침을 뱉겠느냐 이런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아주시더라고요.”
군인들이 지나간 뒤, 그는 그때까지 찍었던 영상을 재빨리 회사에 전송했다. 이후엔 소통관에서 카메라 장비를 챙겨 본청으로 달려갔다. 이미 본청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국회의원 보좌진과 시민들이 문을 봉쇄하고 군인들과 대치중이었다. 그는 그 장면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한쪽에선 틈을 타 군인들이 창문을 깨고 본청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조다운 기자는 국민의힘 사무총장실 당직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군인들이 이쪽 사무실을 뚫고 들어올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총장실로 뛰어간 그는 군인들과 창문 앞에서 눈이 마추졌다. 순간 “저 새끼들 뭐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본 군인들은 사무총장실 바로 옆 정책위의장실로 이동했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군홧발 소리를 조 기자는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곧이어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책위의장실 문 앞에서 대기하다 군인들과 부딪혔다. 휴대전화를 든 채로 벽에 밀렸는데 ‘누구를 밀치냐’며 격하게 저항했다. 군인들은 별 반응 없이 본회의장 쪽으로 우르르 뛰어갔다. 그는 그 뒤를 쫓아가며 연속해 사진을 찍었다.
그 시각 본회의장 안에선 공병선 아시아경제 기자가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상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꼼꼼했다. 의원 몇 명이 국회 내 계엄군 진입을 알리며 안건 상정을 재촉했지만 우 의장은 “이런 사태는 절차가 잘못되면 그것도 문제”라며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직전 무장한 군인을 목격하고 본회의장에 들어온 그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급하게 처리하면 안 될 거라 생각했어요. 안건 가결만으로 계엄 사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더욱 절차에 빈틈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일 새벽 1시경 재석 의원 190명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됐다. 하지만 기자들은 바로 집에 갈 수 없었다. 기자실에서 기사를 마감하고 어수선한 국회 분위기를 스케치하며 아침 해가 밝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나병욱 기자는 “군 철수가 시작됐을 때 시민들이 본청 계단 앞에서 ‘민주주의는 승리했다’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며 “영상에 담기도 했지만 그 전율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테이저건 협박에도 굳건히 지킨 기자실
비상계엄이 선포된 3일 밤, 다급한 곳은 국회뿐만이 아니었다. 국방부, 대통령실, 정부세종청사를 출입하는 기자들도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옥승욱 뉴시스 기자는 그날 국방부 후문 쪽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통령 담화가 있을 거라는 이야길 듣고 바로 기자실로 향했는데 때마침 대통령실 정문에서 관용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나가는 장면을 봤다. “지금 생각하면 국무회의를 마치고 국무위원들이 떠나던 중인 것 같아요. 저는 르포를 써볼 생각으로 국방부 청사 정문에 있었는데 거기에 사복을 입은 군인, 또는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포고령 때문인지 잡혀갈 수도 있겠다 생각했고, 평소에 얼굴 아는 분들도 저를 못 본 척 하길래 여기 있다간 답이 없겠다 싶어 기자실로 들어갔습니다.”
기자실엔 이미 국방부를 오래 출입한 선배 기자 3명이 와 있었다. 함께 기사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선배 한 명이 “문 잠궈!” 소리를 쳤다. 군인이 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군인들은 기자실로 들어오더니 “민간인은 다 나가야 된다”며 기자실 퇴거를 명령했다. “테이저건을 쏠 수도 있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국방부 출입기자단 부간사를 맡고 있는 그는 “못 나간다”고 맞섰다. “책임자가 와서 이야기를 하라. 오히려 당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며 설득도 했다.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무력을 사용해 저희를 쫓아내려고 하면 언제든지 쫓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다들 기자실을 떠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비상계엄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제대로 보도를 해야 한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기자실을 지킬 동안 정문에선 군인들이 기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대통령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의도에서 저녁을 먹다 한달음에 달려온 구승은 MBC 기자는 처음엔 기자실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했다. 하지만 포고령이 발효된 직후 상황이 달라졌다. 밖을 돌아다니던 구 기자를 경호처 직원들이 막기 시작했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저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취재하던 상황이었거든요. 안 된다고 막길래 기자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보안 검색대 통과가 안 되더라고요. 출입증이 있는데도 일단 안 된다고 막고,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어요. 계속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그 말만 반복했어요.”
구 기자는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들과 출입기자들 전부가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글을 남겼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왜 1층에서 기자들 출입을 막는 거죠?’ 당시 그는 빨리 기사를 써야 했다. 할 수 없이 휴대전화로 기사를 쓰고 전화 연결로 방송을 했다. “막 말을 하고 있는데 무장한 101경비단이 와서 전화를 끄라는 거예요. 만약 계속 하면 잡아가는 건가 무서웠죠. 결국 빨리 마무리를 하고 끊어야 했어요.”
취재 제한은 대통령실로부터 남쪽으로 117km 떨어진 정부세종청사에서도 이뤄졌다. 비상계엄 선포를 보고 10분 만에 비상식량과 옷가지를 챙겨 기자실로 향한 정민승 한국일보 기자는 가는 도중 국무총리 비서실 쪽으로 차량들이 급하게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에도 청록색 민방위복을 입은 공무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당황한 얼굴들이었어요. 그런데 비상대비정책국 쪽은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갔더니 싸늘한 눈매로 ‘당신 누구냐’며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평소에 지방행정국 자치행정과를 자주 가는데, 그쪽에서도 ‘여기 오면 안 된다. 나가라’고 해서 밀려났어요.”
정 기자는 그날 밤, 정부세종청사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정부 부처 대부분이 자리한 곳인데도 뜨거운 국회 앞과 달리 너무나 한산하고 조용해 이상했다고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복종 의무’가 사라지는 공무원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거든요. 상관의 위법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계엄 땐 정말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아마 공무원들끼리도 반성이 있었겠죠. 그 논의의 결과가 법 개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윤전기 세우고, 9분 만에 현장 라이브도
한편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는 제작 현장에 있는 기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대통령의 중대 발표가 있다는 소식에 최종판 마감을 밤 10시30분으로 늦춘 김준기 경향신문 편집국장(당시 신문국장)은 그날 담화를 보다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21세기에 이 무슨 정신 나간 일인가 싶었어요. 장난도 아니고, 현실감이 안 들었죠. 가장 먼저 한 일은 40판부터 멈춘 거였어요. 윤전기 돌아가는 걸 붙잡고 마감을 자정으로 늦추고 편집국에 뛰어 올라가 최대한 빨리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했죠.”
편집국도 난리가 났다. 원래는 각 부서 야근자 대여섯명에 야간국장 정도만 남아있는 시간대인데 밤 11시부터 편집부 기자들과 데스크, 편집국장은 물론 편집인과 사장까지 모두 회사로 들어왔다. “송년회 시즌이다 보니 술 마시고 있다 회사로 뛰어 들어온 선배도 있거든요. ‘이거는 정상적으로 신문 만들 때가 아니다.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계엄을 보도해야 한다’고 분노하는데 그만큼 흥분 상태였어요. 그런데 제작하는 저까지 흥분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계속 일을 했어요.”
김 국장은 부서마다 기사를 받고 외신 반응까지 담아 자정에 맞춰 40판을 만들었다. 문제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 내용만 신문에 담겼다는 것이었다. 새벽 2시, 40판 이후 새롭게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결국 논의 끝에 호외를 만들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비상계엄이 발령되면 군인들이 언론사를 장악한다는 걸 역사 공부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신문을 만들면서도 ‘과연 내일 배달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만들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신문은 만들어야 하니까. 그땐 무서운 줄 몰랐던 것 같아요.”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시각, 방송 쪽에서도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휴가 첫날을 맞아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김윤상 오마이TV 팀장은 비상계엄 선포 영상을 보고 순간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세 번을 돌려본 뒤 그때서야 옷을 갈아입고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어디 있냐. 빨리 와라. 지금 여의도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데 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곤 차를 몰아 15분 만에 여의도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라이브 방송이 시작된 뒤였다. 야간 방송을 하던 기자들이 뒷정리를 하다 계엄이 터진 걸 알고 바로 국회로 달려 나갔다. 당시 오마이TV는 계엄 선포 9분 만에 국회 모습을 생중계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현장에서 라이브를 물렸거든요. 가장 먼저 현장을 갔고, 가장 먼저 송출했다는 자부심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생방송과 함께 오마이TV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보안이었다. 포고령이 발표된 이후 언제든 계엄군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생각에 스튜디오 문을 걸어 잠그고 또 다른 스튜디오로 인력을 분산했다. “잡혀갈 땐 잡혀가더라도 끝까지 방송을 하는 게 목표였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건물에 사는 한 주민이 1층에서 저희 사무실 찾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군인들이 저희가 있는 오피스텔 건물까지 온 거죠.”
◇2년간 말 없던 아들 배웅에 눈물 펑펑
오마이TV 스튜디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KBS에서도 사옥을 사수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박상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장은 공교롭게도 그날 농성을 위해 신관 로비에 천막을 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연찮게 계엄 선포 영상을 보고는 가만있을 수 없어 국회로 향했는데 날아드는 헬기와 몰려드는 시민들을 봤다. “그때 계엄이면 군인들이 방송국으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급하게 사무실로 복귀하면서 조합원들에게도 ‘올 수 있으면 와 달라’고 연락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그날 계엄군이 KBS를 장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본부장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날 계엄 특보를 정시에 방송했던 곳은 지상파 3사 중 KBS가 유일했어요. 당시를 살펴보면 보도국장이 오후 6시에 퇴근했다가 황급히 8시에 복귀하고, 뉴스 부조정실에 들어가 생전 하지 않던 신호 확인을 하는 등 미심쩍은 상황이 많이 관측됐거든요. ‘국장이 계엄을 미리 알고 특보를 진두지휘했던 것 아니냐’ 노조가 이런 의혹을 제기해 경찰에 고발했고, 다만 수사가 지지부진해 아직 결론이 나오진 않은 상태입니다.”
취재진이 고군분투한 그 밤, 몸을 피한 기자도 있었다. ‘명태균 게이트’ 등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보도해온 김기성 뉴스토마토 편집국장도 그중 한명이었다. “계엄 선포를 보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어요. 일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상황 정리가 안 됐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던 그때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태균 TF는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김 국장은 처음엔 거부했다. “요즘 세상에 휴대전화 위치 추적, 블랙박스, CCTV를 피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답했어요. 그리고 솔직히 계엄군을 피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표의 한 마디가 그의 생각을 바꿨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수갑을 찰 수는 없지 않느냐.” 김 국장은 수긍했다. 그는 TF 기자들과 함께 회사 바로 옆 호텔로 피신했다. 휴대전화는 꺼놓지 않았다. 기자들 보고를 받아야 하는데, 지휘부가 전화기를 꺼놓을 순 없었다. 김 국장은 그날 밤 집을 나선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사춘기가 심하게 와 2년간 말을 섞지 않던 고등학교 1학년 큰아들이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따라 나왔다. “‘아빠 무사히 다녀오세요’ 이 말을 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더라고요. ‘혹시 아빠가 잘못됐다는 뉴스가 전해지면 부끄러워하지 마라. 당당하게 고개 들고 지내고, 네가 장남이니 엄마와 동생 잘 보살펴라’ 이렇게 말을 하고 차에 탔어요. 그리고 차 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되돌아보면 김 국장은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처음엔 ‘대통령이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본회의가 잡혀 있어 의원들이 국회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데 비상계엄을 하다니, 잘못된 판단이라 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밝혀지는 그날의 상황에 소름이 돋았다. “야당 대표뿐만 아니라 여당 대표까지 체포 명령이 떨어졌고, 언론사에 대한 통제 지시 등을 보면서 ‘만약 계엄이 성공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수출과 해외 투자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나마 정권 교체가 되고 외교가 정상화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힘, 민주 시민의 힘과 저력을 보여주게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12월3일 밤, 기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체포될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펜을 잡았다. 그렇게 기록된 그날 밤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 됐다. 1년이 지난 지금 기자들은 다시금 되새긴다. 현장의 중요성을, 기록의 중요성을.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기자들은 앞으로도 매순간 현장을 기록하고 지켜낼 것이다.
강아영, 김한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