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 기득권 남성 카르텔이 광범위하게 연루됐다고 알려진 대규모 미성년자 성착취 사태 ‘엡스타인 스캔들’의 전모가 곧 세상에 드러날 전망이다. 주범인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의 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미국에서 18일(현지 시각) 통과되고, 다음 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까지 마쳤다. 법무부는 30일 이내에 “검색 및 다운로드 가능한 형식”으로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이는 엡스타인의 죽음으로부터 6년, 그의 성범죄 사실이 경찰에 처음 신고된 때로부터 20년 만에 이뤄진 중대한 진전이다. 빌 클린턴, 트럼프 등 진영 불문 정·재계를 아우르는 최상부 계층을 상대로 이기기 불가능해 보였던 이 싸움은 생존자들의 끈질긴 투쟁과 여성 연대, 권력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강력한 대중 지지, 이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초당적 압력이 결합한 끝에 승리로 이어졌다.
문건 공개를 “민주당의 사기극”이라 비난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입장을 선회해 법안에 서명한 것은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비롯해 전 사회적인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 측은 이 문건이 민주당 인사들 상당수를 무너뜨릴 좋은 무기라 봤고, 진보 엘리트와 싸우는 포지션을 취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막상 문건 공개를 망설이며 기득권 계층을 방어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지지를 철회할 태세로 맞섰다.
일부 남성 보수층이 정치적 도구로서 문건을 활용하려 했지만, 미국 사회 전반의 입장은 목소리 낸 생존자 여성들에게 연대하는 대의로 모아졌다. 성폭력 피해자의 정의 실현, 남성의 권력형 성폭력 및 실패한 사법 시스템 단죄라는 더 큰 가치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은 한 단계 진보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냈다. 당을 초월한 의원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 법안은 427대 1로 하원을 통과했고, 상원은 이를 가결했다.
이런 미국을 보며 함께 고무되는 한편, 지금의 한국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에 조금 아득해졌다. 기득권 남성의 성 비위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문제에서 한국은 여전히 기득권층의 정치적 보호주의가 굳건하고, 사법 시스템과 사회 통념 깊숙이 가부장적 성 윤리가 자리 잡고 있다. 위력 성폭력 피해자 연대 등은 ‘젠더 갈등’ 프레임에 갇히고, 다수의 시민이 이 논쟁에 끼어드는 것을 꺼리며 보편적 대의로 확장되지 못한다.
여성 의제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존재함에도 정치적 주류로 좀처럼 편입되지 못하도록 문화적, 구조적 장벽을 쌓는 남성 권력의 의도는 간단하다. 제도 변화 논의에 참여하는 정치적 비용을 올려버림으로써 현 체제에 도전하는 이들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이 구도에 균열을 가하기 위한 압박은 정치·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연대에 참여하는 이들이 대다수가 될 때 가능해진다.
최근 유튜버 곽혈수씨의 성폭력 피해 공론화와 함께 제기된 비동의 강간죄 도입 촉구 청원에 5만명이 하루 만에 동의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됐다. 22대 국회에서 비동의 강간죄 요구 청원 성사는 이번이 세 번째이고, 발의도 시도됐지만 법안 제출에 필요한 국회의원 10명의 동의도 확보되지 않는 실정이다. 국회 논의, 폭넓은 시민적 연대 모두 요원한 채 성폭력 생존 여성의 외로운 싸움을 방치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무척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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