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를 가슴에 숨기고 웃으며 대화한다.”
국제무대 최일선에서 국익을 위해 협상에 임하는 외교관들의 삶은 이렇게 요약되곤 한다. 특정 국가와의 갈등이 있을 때는 현장에서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이들이 외교관이다. 협상이나 담판에 앞서 테이블을 마주하고 손을 내밀어 맞잡기도 하지만 이는 장갑을 끼고 악수하는 격이다. 냉혹한 국익 앞에서 서로 따스한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외교관의 말은 해석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외교가에서 “서로 입장을 충분히 교환했다”라는 말은 겉으로는 대화를 잘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무런 실질적 진전이 없었을 때 자주 사용된다.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협상 실패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외교적 화법이다. 오늘은 실컷 싸웠어도 내일은 또 본국의 훈령에 따라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지 모른다. 타협의 가능성을 위해 모호성과 완곡한 표현은 외교적 수사의 기본이다.
최근 일본 오사카 주재 중국 총영사는 SNS에 “제 멋대로 들이밀고 있는 그 더러운 목을 주저함 없이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는 위협성 발언을 올렸다. 7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중의원에서 ‘타이완 유사시’는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에 대한 반응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타이완이 공격받을 경우 존립 위기 사태로 볼 수 있다고 봤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언급한 것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처음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과 통일을 지상 과제로 천명해 온 중국의 입장에선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발언이라고 봤을 법하다.
하지만 외교관의 화법을 크게 벗어난 중국 총영사의 ‘위협’은 일본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집권 자민당은 이에 발끈해 중국 총영사의 발언을 비난하는 결의를 했고 일부 의원들은 아예 추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자국민의 일본 여행과 유학 자제를 권고하고 일본 대사를 불러들여 다카이치 총리 발언에 항의했다.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이 자리에서 “14억 인민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모든 결과는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쯤 되면 외교를 넘어 ‘말’의 전쟁에 다가서는 셈이다.
중국과 일본의 냉랭한 분위기는 지난달 경주 APEC에서 양국 정상회담 때도 드러났다. 30여분간의 짧은 회담이었지만 양측은 의례적인 덕담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타이완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의 갈등에 불이 붙는다면 한반도의 외교·안보 지형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국은 경주 APEC을 계기로 한국이 핵잠수함 건조계획을 확정 짓고 한미 동맹 발전 논의에 탄력이 붙자,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주한 중국 대사는 “한미 동맹이 타이완 문제에 결코 불을 지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미 동맹 현대화’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타이완’에 대해서만큼은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현재로선 이 같은 일련의 상황들이 더 악화될지 아니면 외교가 다시 활발히 기능하게 될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다만 역사적으로 ‘말의 전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실제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뒤 오스트리아 외교부는 세르비아 정부에 사실상 수용 불가능한 조건들을 최후 통첩하면서 외교적 화법으로 보기 어려운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언사를 사용했다. “세르비아의 범죄적 선동은 뿌리부터 근절돼야 한다”, “세르비아의 타락한 정신을 짓밟아야 한다”면서 세르비아 정부를 ‘국가 운영의 기본도 모르는 집단’으로 규정했다.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이후 참혹한 진지전과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외교 화법이 언어 폭력으로 비화하고, 말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더구나 지금은 1차대전 직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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