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MBC의 제도 개선 약속은 그 무게가 매우 무겁고 방송사 전체에 미칠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딸의 억울한 죽음 이후 투쟁을 거쳐 얻어낸 결과가 알맹이 없는 선언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MBC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오늘의 약속을 하나씩 이행해 나가야 할 겁니다. 저도 하늘에 있는 요안나와 함께 MBC의 노력을 지켜보려 합니다.”
며칠째 흐리던 하늘이 모처럼 맑게 갠 날이었다. 고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씨는 안형준 MBC 사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딸의 명예사원증을 품에 안고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15일 서울 마포구 MBC 사옥에서 열린 MBC와 오씨 유족 측의 합의문 서명식이 진행된 자리였다. 오씨가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다 세상을 떠난 지 1년하고도 1개월이 지난 날이자, MBC 앞에 유족과 시민단체가 함께 오씨의 사망 문제 해결을 위한 농성장을 차린 지 38일째 되는 날이었다.
장씨는 딸의 사망 사건 해결을 위해 MBC와의 잠정 합의문이 나온 5일까지 총 28일간 곡기를 끊기도 했다. 단식 농성에 들어갈 당시만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문제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돼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장씨는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합의문에 사인한 후 장씨는 “단식 날짜가 늘어날수록 하루하루 너무 힘겹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제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며 “평생 노동이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려본 적도 없는 제가 농성장에 오는 분들에게 어느새 동지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연대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MBC와 유족 측의 합의 사항은 크게 네 가지. △대국민 기자회견 진행과 재발방지 대책 및 제도 개선 방안 약속, 명예사원증 수여 △내년 9월15일까지 추모 공간 MBC 본사 내 마련 △기존 기상캐스터 직무 폐지 및 정규직 직무인 기상기후전문가 전환 △유족 보상 등이다. 장씨의 말대로 앞으로 MBC의 합의 이행 여부가 중요한 대목이다.
합의 내용 중 기상캐스터 정규직 직무 전환에 대해 장씨는 “분향소에 들러주신 시민들이 고인의 죽음과 연관된 기상캐스터 정규직화 요구에 의아해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 안나처럼 힘들게 일하면서도 프리랜서 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고통받고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젊은이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직장 내 괴롭힘 문제 역시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며 “기상캐스터 정규직화 요구는 우리 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자 제2의 오요안나를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안형준 사장은 이날 서명식에서 “꽃다운 나이에 이른 영면에 든 고 오요안나씨의 명복을 빈다. 헤아리기 힘든 슬픔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 오신 고인의 어머님을 비롯한 유족께 진심으로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오늘의 이 합의는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없어야 한다는 문화방송의 다짐이기도 하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MBC는 지난 4월 상생협력담당관 직제를 신설해 프리랜서를 비롯해 MBC에서 일하는 모든 분의 고충과 갈등 문제를 전담할 창구를 마련했고,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대우 등의 비위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도 수시로 시행하고 있다”며 “책임 있는 공영방송사로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조직문화 그리고 더 나은 일터를 만들어 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양쪽의 합의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과정에 대한 소회도 나왔다. MBC 측 협상에 참여했던 박건식 기획본부장은 “옆에 계신 두 분 (유족 측)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 김유경 노무사께서 많은 고생을 해 주셨다”며 “종교인들께서 큰 뜻으로 MBC를 방문해 주셨고, MBC가 화해와 포용의 마음으로 수용을 하고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라는 깊은 말씀을 주셨다. 종교인들의 노력 또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유족 측을 대리했던 박점규 위원은 “사실 MBC 내부의 여러 가지 반발이나 반대 기류가 굉장히 높았으나 두 MBC 본부장들이 마음 열고 적극적으로 나서 내부를 설득해 한걸음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가족이 3일 이상 단식한 적이 없다. 28일 곡기를 끊어야 합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슬프다”며 “부족한 합의안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님이 딸의 명예를 회복하고 타 방송사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돼서 처우 개선이 이뤄지는 작은 물꼬라도 트자는 마음으로 받아주셨다”고 했다.
다만 기자회견 질의응답 과정에서 MBC 측의 재발방지 대책,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박미나 MBC 경영본부장은 “지금 법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이 근로자에만 국한되어 있어 저희 제도도 그런 부분으로 설계되어 있는 면이 있었다”며 “그래서 저희가 사규도 고치고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상생협력담당관 자리도 만든 거다. 회사는 계속해서 제도 개선을 해나가고 프리랜서들도 안전하고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요안나 노동자여, 이젠 차별없는 세상서 마음 편히 쉬길”
고인의 영정사진 옆엔 명예사원증이 이제야 놓이게 됐다. 38일간 오씨의 분향소가 설치된 농성장을 지키며 이제는 “동지”가 된 장씨와 수십 명의 시민들은 투쟁을 마무리하는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이날 보고대회에서 고 이한빛 PD, 고 김용균씨 유가족을 비롯해 투쟁에 참여했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은 오씨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유족 측을 대리해 협상을 진행했던 김유경 노무사는 MBC가 합의 이행 약속을 지키는 지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노무사는 “사실 어젯밤 내용을 많이 적었지만 이 내용은 그냥 무시하겠다. 방금 전 안형준 사장이 발표했던 내용이 유감스러워 합의문에 담긴 내용의 의미, 앞으로의 과제를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오늘 이행됐다고 볼 만한 내용은 명예사원증 수여 한 가지였다. 합의 문구를 보면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안 사장이 재발방지 대책, 제도 개선 방안 약속을 한다고 되어 있지만, 상생협력관처럼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끝났다”고 지적하며 “합의가 이뤄진 마당에 우리가 투쟁을 바로 돌입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행하는지 반드시 지켜봐야 될 것 같다. 연말에 가서도 만약 이행되지 않는다면 저희는 당연히 또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해서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적용받지 못하게 되어 있어 프리랜서 신분이었던 고인은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할 수 없었고, MBC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5월19일 고용노동부는 MBC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하며 오씨에 대한 괴롭힘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기 어렵고, 이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 규정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김은진 변호사는 “이번 합의는 고인의 명예 회복과 공영방송의 책임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노동부의 모순된 결론, 비겁한 논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직장 내 괴롭힘은 인정되지만 보호 의무가 있는 그 사용자에게 책임은 묻지 못하는 모순된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 이 사건은 특수고용 노동자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의 범위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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