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차별 현실 모르는 대통령의 '무지의 권력'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괜히 여자가 남자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여자가 남자를? 상상하기 어려운 접근이라 안타까워요.”


9월19일 청년 대상 토크콘서트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여자가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것도 ‘괜히’ 미워하는 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보기에 오늘날 여성들은 별 이유도 없이 남성을 싫어하고 있으며, 이는 상상도 힘들 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를 농담조로 말한 대통령으로서는 웃자고 한 발언에 반응이 왜 이리 시끄러운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남자를 미워하는 여자들’의 과민반응에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거나.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서울 마포구 구름아래 소극장에서 열린 2030 청년 소통·공감 토크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이 문제에서 정말 안타까운 건 여자가 남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2025년에도 이 정도인 국가 지도자의 인식 수준이다. 더 안타까운 건 이 발언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할 이들 역시 우리 사회에 상당수 있다는 것, 이로 인해 대통령의 인식이 정말 개선될 수 있을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기에 바빠야 할 청년 남녀가 편 지어 다투고 있다니!”,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지 그럼 여자를 좋아하는 게 정상이냐?”, “원래 여자의 적은 여자야” 같은 말을 듣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이게 국민 정서라며 그대로 대변할 뿐인 이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 여성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자 ‘젠더 갈등’을 멈추라는 사회가 정말 성평등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이 뉴스 사회면을 장식하는데, 여기엔 일언반구 없다가 “너무 화내지 말고 남자랑 잘 좀 지내봐”라고 할 수 있는 무감각함은 어느 쪽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나. 이 발언의 정치적 편향성과 폭력성, 비양심성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정부에 여성들은 어떤 기대를 가질 것인가.


한국 사회 전반의 게으른 성 인지 감수성은 구조적 여성 차별과 가부장적 여성혐오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드러내는 지표다.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힘들다는 시각, 여성이 남성 또는 다른 여성과 빚는 갈등을 가부장제라는 차별적 시스템을 지운 채 개별 갈등으로만 치환하는 관행 등은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사회 구조를 보지 않으려는 끈질긴 시도다.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사실’을 구분하지 않는 탈진실적 태도 역시 위험하다. 이날 이 대통령은 “20대 여성 70.3%는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20대 남성의 70.4%는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통계를 인용했고, 지난 7월에도 “남성들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영역이 있는데 공식적 논의를 어디서도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한국의 여성 차별은 각종 수치로 증명된 사실이지만 남성 차별은 남성들이 그렇다고 느끼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 감정 온도가 매우 뜨겁다고 해서 진실의 지위를 부여해 버리는 포퓰리즘적 행태는 곤란하고 유감스럽다. 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면 주관적 인식과 엄연한 사실의 차이를 어떻게 알려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반면 여성 청년의 절박한 호소에 담긴 사실들은 얼마나 손쉽게 느낌일 뿐이라고 일축돼 왔는지 비교해 본다면 문제의 본질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실정이니 섣불리 ‘여성’을 떼고 ‘성평등가족부’로 여성가족부의 문패가 바뀌는 것이 걱정이라는 일각의 우려도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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