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식과 '철의 장막'

[이슈 인사이드 | 국제·외교]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8월15일은 한국과 폴란드 두 나라에 모두 의미 있는 날이다. 한국에선 광복절이고 폴란드에선 국군의 날이다. 폴란드는 1920년 이날, 수도 바르샤바를 가로지르는 비스와강 일대에서 볼셰비키 붉은 군대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이를 기념해 국군의 날로 지정했다. 8월15일 ‘바르샤바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에서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마지막 전투였다.

8월15일 폴란드 국군의 날 기념식에 열린 열병식에서 의장대가 열을 맞춰 서 있다.

그러나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 해체와 유럽의 냉전 종식 때까지 이날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지 못했다. 1992년이 되어서야 기념일로 환원됐다.


올해 8월15일 폴란드 국군의 날 기념 열병식은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다큐 제작차 우크라이나로 들어가기에 앞서 바르샤바에 머물며 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현장에서 열병식을 취재할 수 있었다. 그날은 섭씨 35도의 열기와 강렬한 햇볕 탓에 도열한 의장대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비스와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시민들이 가득 메운 가운데, 기념식 연단에 등장한 폴란드 대통령은 러시아를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한국산 전차 1000대를 포함해 기갑전력을 더 늘려야 한다고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제질서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안보 위협을 높이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할 때는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러시아는 무적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폴란드가 국군의 날 기념 열병식 행사에서 첨단 무기들을 선보였다. 사진은 K2흑표전차 폴란드 버전인 K2 PL.

대통령 연설이 끝나고 본격적인 군사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한국산 전차와 자주포를 포함해 폴란드군이 보유한 첨단 무기들이 속속 등장했다. 다양한 기종의 전투기들이 편대비행을 하며 창공을 가르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3주 후인 9월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천안문) 광장에서 ‘전승절’ 열병식이 열렸다. 1만2000명의 병력이 참가한 이날 대규모 열병식은 발을 직각으로 올리며 걷는 ‘거위 스텝(goose-stepping)’과 대열을 이룬 병사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칼각 행진’으로 주목을 받았다. 중국이 자랑하는 현대식 미사일도 대부분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자리했는데, 북·중·러 3국 정상의 만남은 66년 만에 이뤄져 주목을 받았다. 그런 만큼 외견상으로는 이들 세 나라 간 ‘진영 연대’가 강화된 모습으로 비쳤다.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 국경 사이에 위치한 '발리마 Vaalimaa' 국경검문소. 지금은 폐쇄돼 있다. /신봉승 KBS 기자 제공

그동안 중국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진영 연대’는 ‘냉전 시대의 유산’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달러 위주의 국제 금융결제 시스템에서 퇴출당한 러시아, 그리고 핵 개발로 공식적인 유엔 제재를 받는 북한과의 ‘연대’ 강화는 중국이 원하는 그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이 3년 7개월 넘게 계속되면서 러시아가 북한에 손을 내밀고, 중국 역시 ‘영향력 제고’라는 관점에서 북한에 다가서면서 동북아 정세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한반도 외교·안보 이슈와 국제문제를 살펴보는 저널리스트로서 대규모 열병식이 뉴스의 주목을 받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세상이 더 시끄러웠던 시기였다. 지금 핀란드에서부터 발트 3국은 물론 카프카스산맥 남단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나라들의 최우선 국가 과제는 ‘안보’다. 국경에는 첨단 감시 센서가 장착된 다양한 형태의 장애물들이 세워지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긴 평화가 계속되는 줄 알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몰고 온 파도는 이런 기대를 흩날려 버리고 군비 증강과 새로운 장벽 건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련의 대규모 열병식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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