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9월 중 처리를 목표로 언론중재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현업 4단체가 이 같은 ‘속도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시민피해구제 확대란 취지엔 찬성하지만 언론의 권력감시 기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큰 사안인 만큼 정교한 논의와 숙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PD연합회는 5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이 본회의 처리를 목표로 하는 25일까지 겨우 3주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며 “법안 초안조차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추석 전 처리’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앞서 언론 현업단체들은 8월29일 공동 성명에서 ‘언론의 사회적 책임 강화와 시민 피해 구제 확대에 공감하지만 언론의 권력감시 위축 등이 우려되므로 정교한 논의와 숙의 과정을 통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한 바 있다.
4단체는 이날 오전 민주당 언론개혁특별위원회가 내놓은 언론중재법 주요 내용을 언급, “보도자료에 담긴 개정안 내용 자체가 사회적 숙고가 필요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다. 이들은 “일반적 법체계와 달리 손배액의 하한을 두는 기본손해액 조항, 고의·중과실 추정에 따른 입증책임 전환 요건 등 하나하나가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언론단체들은 “특히 보도자료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권력자들도 언론에 대한 배액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면서 “남용을 막기 위한 방안이 들어있긴 하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반드시 언론중재위를 먼저 거치게 하는 방안은 위헌 논란에 휘말릴 소지가 크고, 전략적 봉쇄소송 방지규정은 기존 우리 법체계에 없는 제도라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3일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이 언론중재법 개정에 대해 ‘굉장히 신중하게, 숙의를 통해 폭넓게 들어야 한다’며 대기업에 대한 보도는 징벌적 배상 대상에서 제외하고 정치인 관련 보도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한 라디오 인터뷰를 거론하기도 했다. 단체들은 “지금에서야 처음 법안 내용을 접한 학자·법률가들도 속도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모든 현업 종사자와 전문가들이 ‘무조건 반대’도 아닌 ‘사회적 숙의’를 요청하는 마당에 속도전을 고수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따라 언론단체들은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구한다. 사회적 숙의를 통해 시민피해구제를 확대하면서도 언론의 권력감시 기능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박종현 한국기자협회장도 이날 기자회견 발언을 통해 언론중재법을 속도전으로 추진하는 집권여당의 행보에 우려를 표했다. 박 회장은 “(민주당은) 이달 25일까지 본회의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언설을 내뱉은 이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언론계와 시민단체, 전문가들과 충분한 숙의는 없다.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볼 법안 상세 내용도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며 “거칠게 살펴보면 이건 언론중재법이 아니라 언론 징벌법, 언론 억압법, 취재 봉쇄법으로 전이될 수 있는 아주 좋지 않은 사안”이라고 봤다.
‘내란 정권’ 때 징벌적 배상제 있었다면?
박 회장은 아울러 “시민 피해구제는 완전히, 100% 동의한다. 하지만 정치권력, 대자본에 대한 감시기능을 약화시켜서야 되겠나. 이대로라면 내부자 고발 보도 등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취재원 보호 등 조치도 어려워진다”며 “행보를 보면 정치인들이 본인들을 위해 하는 일 처리이고, 접근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12월 불법 비상계엄 이후 어두운 터널을 시민사회와 함께 헤쳐 나왔는데 9개월이 지난 지금 더 도약시키고 복원해야 하는 단계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며 “지금은 집권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시간이 아니다. 함께 어둠을 헤쳐 온 시민들, 국민들의 시간이다. 민주당 언론개혁특위가 진행한 ‘가장 중요한 언론개혁’ 과제를 물은 여론조사에 따르더라도 언론중재법 개정을 꼽은 이들은 응답자의 3%가 안 됐다. 언론중재법 개정은 6가지 항목 중 가장 낮은 우선순위였다. 나머지는 지금 현안이 아니다, 당장 급한 건 따로 있다,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데 민주당, 특히 언론특위 새 지도부는 이 사안을 휘몰아치고 있다. 숙의의 과정이 필요한 만큼 천천히 접근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언론노조에선 개정안이 언론탄압에 악용될 가능성과 법안 내용의 부작용에 대해 중점적으로 언급했다. 김도원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내란 정권 때 언론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바이든-날리면' 보도가 표적이 돼 MBC는 아마도 억대의 배상금을 물게 됐을 거다. 견강부회가 아니다. 실제 1심 재판부는 허위보도라며 정정보도 판결을 내렸다. 대통령 관저를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바꾸는 과정에 김건희 여사가 개입했다는, 김 여사의 국정 관여를 일찍부터 경고한 보도의 취재기자는 명예훼손으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징벌적 배상 제도가 있었다면 민사 소송까지 추가해서 괴롭혔을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윤석열 대선후보 검증보도, 천공과 건진법사의 국정개입 의혹보도, 김건희 명품백 수수 의혹보도 등등 당시엔 허위보도 취급을 받았지만 뒤늦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징벌적 배상이 있었다면 이런 의혹 보도는 크게 위축됐을 것”이라며 “거대 기업도 커다란 위협이다. 지난해 쿠팡이 기자들을 포함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취재기자를 형사 고소했는데 만일 악의적 보도로 매출 타격을 입고 기업 이미지가 훼손됐다며 징벌적 배상을 청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그는 “쿠팡 연매출이 40조원인데 피해액이 매출액의 0.1%라고만 주장해도 400억원이고 3배라고 하면 1200억원짜리 손배 소송이 되는데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언론사가 있을까”라고 부연했다. 덧붙여 그는 “이런 소송에서 이겨봐야 본전이다. 아니 소송 대응에 허비하는 시간, 비용, 부담감을 감안하면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취재를 할 시간도 빼앗기고 소송 걱정 때문에 정당한 고발 보도도 주저하거나 아예 안 하게 될 수도 있다”며 “무조건 반대가 아니다. 악용을 막으면서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찬 언론노조 위원장은 “2021년 언론중재법 개정이 사회적 논란이 됐다. 언론 자유가 위축되고 권력 감시가 약화될 것이란 우려의 법 개정이 중단됐다. 그때도 정치인과 공직자, 대기업 주요 주주, 임원 등은 제외됐다. 공익 침해 행위에 대한 언론 보도, 청탁금지법 관련 언론 보도 등도 제외됐는데 오늘 오전 민주당 언론 개혁 특위가 낸 보도자료를 보면 이런 예외 조항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정치인, 공직자, 대기업에 대한 허위 조작 보도도 존재하는 것 아니냐, 이에 대한 징벌적 손배도 필요하다 이렇게 주장한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이미 현재의 제도로도 충분하게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있고, 언론에 충분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사례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권력자들에게 실제 손해액의 수십 배에 달하는 배액 배상을 해야 할 긴급하고 중대한 사유가 있나. 대기업 삼성에, 대기업 현대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주어서 우리가 얻어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라며 “그로 인해 약화될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에 대한 감시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피해로 이어질 것이 명약관화하다”라고 했다.
그는 또 “허위 조작 보도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지적들을 하신다. 하지만 허위 조작 여부는 수년 뒤에 밝혀진다.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보도, 탐사보도 초창기 당사자들은 무조건 부인하고 허위 조작이라 주장한다”며 “중재법이 개정되면 수십억의 징벌적 손배를 청구할 것이고 그럼 손배 청구 시부터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기 전까지 언론은 압박 받을 수밖에 없고 감시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며 “입증책임 전환이나 배액 배상 기준, 정정 보도 기한과 방식 등 머리를 맞대고 세심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 많다. 언론의 자유를 하나하나 침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성호 방송기자연합회장은 “토론은 부족한데 일정은 뚜렷하다”며 말문을 열었고 이번 법 개정이 형법상 명예훼손 폐지 등과 맞물려 더 큰 논의를 필요로 한다는 취지를 드러냈다. 박 회장은 “한국 언론은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러 가지 억압적 수단 하에 놓여 있다. 형법상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처벌을 하고 있는 나라가 흔치 않다.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언론 자유를 평가할 때도 명예훼손에만 해당되면 진실을 보도하더라도 처벌 위기에 놓인 것이 한국 언론인들이다, 이렇게 매년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잘못된 보도로 구제받아야 할 손해배상액 현실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민피해 구제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자면 더 큰 틀에서 표현의 자유와 또 시민 권리 구제를 보장하는 것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는 식의 논의가 있어야 한다”며 “이런 논의를 하지 않고 언론중재법만 고치겠다면 언론인들은 언론 자유 억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언론중재법만 놓고 논의할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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