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일(현지 시각)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이 열린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 양 정상의 모두발언이 끝나고 트럼프 대통령이 “Okay, Questions please(질문하세요)”라고 말하자 취재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 기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일제히 큰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오벌 오피스에 들어간 한국 취재기자들은 생소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설승은 연합뉴스 기자는 “미국 기자들은 무조건 소리를 지르며 질문을 시작하거나 자기를 시켜달라는 그런 환경이었다”면서 “질문하려면 트럼프 대통령과 눈을 마주쳐야 해서 손을 들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고 말했다. 강청완 SBS 기자는 “한국과 완전히 다른 낯선 분위기에 약간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몇 차례 질의응답이 오가고 한국 기자들도 질문 기회를 얻었다. 영어에 능통한 아리랑TV를 시작으로 코리아타임스 기자가 소리를 높여 트럼프의 지목을 받았다. 기자들은 질문 기회를 얻기 위해 자리를 맞바꾸기도 했다. 박영준 세계일보 기자는 “소리도 지르고 자리를 바꿔가면서 질문했다”면서 “한 사람당 질문 기회가 두 번 오지 않으니 먼저 질문한 기자가 자리를 양보하면 그 자리에서 또 다른 한국 기자가 질문했다”고 말했다.
오벌 오피스 취재는 자리 확보 경쟁부터가 치열했다. 그날 오후 12시33분쯤 백악관 웨스트윙 입구에 도착한 이 대통령을 트럼프 대통령이 마중 나온 현장을 스케치한 한국 취재진은 안내를 받아 백악관 내부로 들어갔다. 이미 오벌 오피스로 들어가는 앞줄은 미국 기자 20~30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미국 기자들이 안으로 돌진해 자리를 선점했다. 뒤늦게 들어간 한국 기자들은 미국 취재진 틈바구니에 끼어 취재하다가 조금씩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몇몇 한국 기자들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스티븐 찰스 위트코프 중동 특사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취재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설승은 기자는 “백악관 직원이 그 사람들한테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저를 툭 치면서 뒤로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 여부’와 ‘참석한다면 김정은과 시진핑을 다시 만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높았던 회담 분위기는 질의응답이 이어지며 조금씩 풀려갔다. 이제 그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준규 CBS 기자는 미국 취재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트럼프를 향해 영어로 질문했다. “오늘 아침 한국에 대해 교회와 미군기지 압수수색을 언급하며 ‘숙청’과 ‘혁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어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서는 “내란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 부분을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이 기자가 질문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트럼프는 정상회담을 약 3시간 앞두고 자신의 SNS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숙청 또는 혁명같이 보인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열린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새 한국 정부가 교회를 급습하고 군 기지에 들어가 정보를 빼냈다는 취지로 말했다. 트럼프의 도발적 메시지는 정상회담의 성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이 기자는 “회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거나 회담 흐름을 깰 수도 있어 그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올린 글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답변하면 계속 의혹이 남을 수밖에 없어 직접 질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동행 취재한 한 기자는 “현장에서 압박감이 컸을 텐데 우리 기자들이 용기 있게 질문을 던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숙청’이나 ‘혁명’이 무슨 뜻이냐고 공개적으로 물은 게 핵심이었다”면서 “그 질문을 우리 기자가 하고 트럼프가 오해라고 확인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기자는 “트럼프 게시글이 국내 정치적으로 혼란을 가중할 수도 있어 걱정이 들었는데, 트럼프가 직접 오해라고 정리하면서 안도했다”고 말했다.
오벌 오피스 현장을 직접 취재한 한국 기자는 7명이었다. 아리랑TV와 코리아타임스는 한미 정상회담의 풀러(pooler·대표로 취재해 전체 언론사에 배포하는 기자)였고, 추첨을 통해 세계일보, 연합뉴스, 한겨레, CBS, SBS 기자 5명이 뽑혔다. 애초 5명은 정상회담 참관인 자격이었으나 질의응답이 미국 기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7명 모두 풀러를 맡고 질문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기자들은 단톡방을 열어 질문을 준비하고 과거 트럼프 대통령 회견 영상을 공유하며 준비했다. 정상회담 당일 오전엔 따로 모여 최종 점검 회의를 하며 질문을 가다듬었다. 박영준 기자는 “미국 기자들이 주로 자국 이슈 관련 질문을 던지는 상황에서 국내 취재진이 한미일 협력이나 북미대화 필요성 등 정상회담 의제에 맞는 질문을 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답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질문을 던지지 못한 강청완 기자는 “평생 한 번 있을 기회인데, 질문을 못 하고 왔다는 자책과 안타까움이 컸다”고 했다. 강 기자는 준비한 질문이 사전 조율 과정에서 조정됐다고 했다.
이번 한일·한미 정상회담을 동행 취재한 기자들은 모두 50여명이었다. 3박6일의 빡빡한 일정 속에 특히 미국에선 하루에 서너 시간씩 쪽잠을 자며 취재했다. 일간지 한 기자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타 언론사 기자들과 24시간씩 같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방송사 기자들은 정규편성 외에도 생중계나 특보를 하느라 거의 밤새도록 일하더군요. 신문사 기자들도 마감 시간이 빠듯한데 끝까지 붙잡고요. 열심히 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되게 인상 깊었습니다.”
대통령실은 이번 정상회담에 동행한 기자들에게 이례적으로 감사 메시지를 내놓았다.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은 8월26일 브리핑에서 “한국 기자의 적극적 질문은 우리가 의제를 선점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고, 강유정 대변인은 29일 브리핑에서 오벌 오피스를 취재한 기자 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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