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언론 힘빼고 친정부 매체 '푸시'… 美수정헌법 1조 흔들

[이슈 분석] '먼저 온 미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바꾼 언론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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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레거시 미디어들은 혹독한 계절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 취임 직후 이뤄진 백악관 취재 배제, 방송사 면허 박탈 위협, 언론 상대 손해배상 소송 등 각종 언론탄압은 “미국 역사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 중 전례 없이 광범위하고 위협적”(5월 국경없는기자회 미국 대표 등 7개 미 언론자유단체장 공개서한)인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미국의 언론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백악관에 출입하는 기성 언론들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대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이른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성향 뉴미디어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월3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기자들에게 여객기-헬기 충돌 사고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AP 뉴시스

‘MAGA’로 채워지는 백악관 기자단

NTD TV, 워싱턴리포터, 브레이트바트뉴스, 워싱턴이그재미너, 린델TV, 리얼아메리카보이스. 한국 사람들에겐 아직은 낯선 미국 언론사 이름들. 모두 ‘친 트럼프’ 성향 매체이자, 우파로 분류되며 각종 음모론마저 설파하는 곳이다. 중요한 건 트럼프 집권 2기 들어 백악관에 입성한 매체들이라는 점이다.


현재 백악관 브리핑룸엔 이 같은 ‘마가’ 성향 매체 기자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브리핑룸 내 기자 100명 중 3분의 1 정도”는 이 매체 기자들이다. AP통신, 뉴욕타임스 등 전통매체 고정석인 49개의 좌석 외에 상단 오른편에 배치된 세 자리는 이른바 ‘뉴미디어’석이다. 과거엔 정부 관료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사실상 “특별대우”를 받는 셈이다. 이 좌석 주변을 둘러싸고 나머지 뉴미디어 기자들이 모여 서서 브리핑에 참여한다. 첫 질문의 기회도 주로 이들에게 주어진다. 브리핑 중에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 이어진다 싶으면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중간중간 이 뉴미디어 기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흐름을 바꾼다.


올해 1월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하고 제일 먼저 꺼내든 언론 대응은 유튜버, 인플루언서 등 ‘1인 미디어’의 백악관 출입 및 브리핑 취재 허용이었다. 곧바로 2월엔 백악관출입기자협회(WHCA)의 ‘풀(pool·공동취재)기자단’ 선정 권한을 박탈하고 백악관이 직접 기자단을 구성한다는 통보도 내려졌다. 소수 인원만 취재가 허용되는 풀기자단에 들어가면 각종 일정을 소화하는 대통령을 근접 취재할 수 있다. 매일 특파원들에겐 WHCA가 돌렸던 대통령 미디어 일정과 풀기자단 명단 안내가 오는데 이제는 백악관 대변일실이 풀을 짜서 알린다. 이 명단엔 ‘뉴미디어’라는 매체 카테고리가 추가되기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에 이어 풀기자단에까지 들어선 마가 성향 매체 기자들은 트럼프의 메시지를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상은 한국경제신문 워싱턴 특파원은 “풀 내용만 봐도 레거시 미디어들만 풀기자단에 있었던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고 느껴지는데, 취재 현장의 뉘앙스를 충분히 전달하지 않거나 분량도 확 짧아지는 일들이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옛날 같으면 미디어로 취급되지 않았을 곳이 풀기자단에 들어가 외국 정상과 중요한 자리 등에서 질문할 기회를 갖게 된 거고, 이들이 정권 우호적 질문을 할 때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의 질문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하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해당 기사를 공유하는 과정이 이어지며 이 매체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정권에 비판적인 레거시 미디어들이 빠진 자리가 마가 성향 미디어로 채워지고 있는 건데 단적인 예로 백악관이 취재단에서 AP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을 배제한 일이 있다. 가장 최근인 7월21일 백악관은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을 다룬 보도를 문제 삼으며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를 트럼프 대통령의 스코틀랜드 방문 취재단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레빗 대변인은 이날 관련 성명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의 허위, 명예훼손 행위로 인해 그들은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할 13개 언론사 중 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은 앞서 2월20일엔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부르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AP통신이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AP통신에 출입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AP통신은 이후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와 전용기 취재까지 제한 당했다.

‘카르텔’ 공격으로 기성언론 힘빼기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CNN 등 이른바 반 트럼프 언론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며 언론에 대한 적개심을 권력을 유지하는 추동력으로 삼아 왔다. 다만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나온 해당 조치들은 비판적 언론과 개별 언론인을 집중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트럼프 1기 때와 비교해선 분명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변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백악관의 기자단 직접 선정도 기존 체계를 파고든 언론탄압의 일환이다. 트럼프 집권 1기 당시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던 김수형 SBS 디지털뉴스편집부장은 “1기 때도 뉴스맥스 등 친정부 매체들을 들여오려 했지만, 당시엔 발붙이지 못했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한 거고, 캐롤라인 레빗이라는 돌격대가 밀어붙여 성공한 것”이라며 “이른바 전통 미디어들의 카르텔이 어마어마하게 세고 거기에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 않은데 트럼프는 그걸 깨기 위해선 기자단에 우호적인 언론들을 집어넣고, 이들의 힘을 키워주면 기존 매체들의 힘이 빠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특파원들은 미국 내 주류 매체들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한 종합일간지 워싱턴 특파원은 “실제로 취재에서 여러 번 배제됐던 AP통신의 최근 보도를 보면 속보 대응이나 질적 내용에서 위상이 떨어졌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어 “이란 핵시설 관련 CNN 보도에 대해 ‘가짜 뉴스’라며 소송까지도 예고했는데 이는 기자단 개방과 같이 트럼프가 기존의 관행을 깨고, 선을 넘은 것”이라며 “경쟁적인 취재 환경에서 제도권 매체들은 ‘나도 잘 못 찍히면 잘못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해당 문제에 대해 백악관 기자들을 인터뷰하려 해도 응하지 않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올 때 기자 개인과 언론사에 천문학적 금액의 소송을 걸어 재갈을 물리는 방식도 진행됐다. 대선 중이던 2024년 11월부터 트럼프는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와의 인터뷰 편집 결정과 관련해 CBS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성추문 소송 보도를 한 ABC, ‘엡스타인 음란 편지’ 보도를 한 월스트리트저널 등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걸었다.


스테파니 마틴 보이시주립대 공공정책 석좌교수는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서 “트럼프는 단순히 자신에 대한 보도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해 화를 내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명예훼손’의 정의 자체를 바꾸고, 공직자가 손해배상을 쉽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그는 “명예훼손의 재정의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례 중 하나인 1964년 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을 뒤집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1964년 미 연방대법원은 “공직자는 단순히 보도가 허위라는 이유만으로는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럼에도 CBS의 모회사인 파라마운트와 ABC 모회사 디즈니는 각각 1600만 달러, 1500만 달러를 트럼프에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해당 소송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CBS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해온 심야 프로그램 ‘더 레이트쇼’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 같은 “전례 없는 굴복적” 합의엔 파라마운트의 스카이댄스와 합병 승인의 키를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브렌던 카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이 쥐고 있다는 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마이클 소콜로우 메인대 언론학과 교수는 ‘더 컨버세이션’에서 “과거 대통령들 또한 방송에 편집 압력을 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만 과거엔 이러한 갈등이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방송사들이 백악관에 굴복했더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 사이 트럼프는 NPR과 PBS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공화당이 주도한 의회에선 공공 미디어에 대한 정부 자금 지원을 전면 폐지하기로 결정해 지역 소규모 언론사는 생존 위기마저 겪고 있다.

“기자들 위축… 내부고발 보도 줄어”

트럼프의 전방위적 언론 탄압은 실제 정권 비판 보도를 위축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고 있다. 백악관 기자단 내부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이상은 특파원은 “백악관 내부에도 권한을 과도하게 남용하는 트럼프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기성 매체에 소스가 되어 주는 경우인데, 규모가 큰 매체들은 소송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보도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매체들은 소스가 있어도 거액의 소송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것”이라며 “친 트럼프 성향인 폭스뉴스조차도 예전만큼의 위상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회사의 보호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사례가 나왔는데 기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수형 부장도 “집권의 경험이라는 게 무섭다. 1기 때는 익명의 고급 취재원 발로 트럼프 진영 안 분열, 혼란에 대한 많은 보도가 나왔는데 2기 인선엔 굉장한 트럼프 충성파들이 들어오면서 이전보다 내부 소스가 많이 줄어든 것도 있다”며 “지금까지는 트럼프가 상당히 승기를 잡았다. 기성 언론이 트럼프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될지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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