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이후 시민들이 모여든 탄핵 광장에선 청년 여성의 목소리가 분출됐다. 광장의 주축이 됐던 이들의 요구는 민주주의 회복 그리고 각종 여성혐오, 성별 갈라치기로 점철됐던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이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계속 존재했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재시동)가 생겨난 지 10년.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 2020년 ‘n번방 사건’ 등을 거치며 여성 대상 범죄, 여성혐오 문제가 한국 사회 전반 주요 이슈로 거듭났다.
이 시기 사회적 흐름에 맞춰 많은 언론사에서 여성·젠더 담당 기자를 비롯해 전담 부서, 버티컬 매체를 만들었으나 수익성 문제, 백래시(반작용) 등 내부의 여러 판단으로 상당수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텨오며 여성·소수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젠더 의제를 발굴·확산하는 이들이 있다. 경향신문 ‘플랫’, 한국일보 ‘허스펙티브’, 한겨레 ‘젠더데스크·젠더팀’. 이들의 생존기를 들어봤다.
독자 초청 행사에 사장이 깜짝 방문도
3월7~8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생일잔치가 열렸다. 5번째 생일을 맞은 경향신문 플랫팀이 ‘입주자’(구독자 애칭)들을 초대한 행사였다. 이틀간의 잔치가 끝나고, 기자들에겐 입주자들이 남긴 80여개의 포스트잇 방명록이 쥐어졌다. 플랫을 향한 응원과 지지, 연대의 목소리였다. “플랫팀이 필요 없어질 그날까지 응원할게요”, “꾸준히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시대에 묵묵히 있어줘서 고마워요”, “플랫팀의 취재와 관심이 없었다면 교제 폭력 생존자, 유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플랫과 입주자들은 서로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함께 해온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독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는 기획 ‘플랫 입주자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엄마 성으로 성·본 변경을 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엄마 성 빛내기’, 학교 선생님의 성평등 교육 이야기 ‘쌤 페미예요?’ 등을 진행해 독자들의 관심 의제를 발굴하고, 이들의 행동을 기록했다. X(옛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와 뉴스레터(플랫레터)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기획 기사, 전용 콘텐츠 생산뿐 아니라 만나서 함께 운동하는 ‘스포츠가 있는 플랫’ 등 독자 참여 행사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20년 3월8일 출범한 플랫은 경향신문의 젠더이슈 관련 콘텐츠를 선별해 담는 뉴콘텐츠팀 산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폼으로 시작됐다. 2021년 젠더데스크 보직이 신설되고, 2023년 9월엔 젠더데스크가 플랫팀장을 겸임하며 플랫은 별도 조직으로 독립했다. 지금까지 경향신문에선 세 번째 젠더데스크, 두 번째 플랫팀장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4명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플랫팀은 현재 팀장과 기자 2명(취재기자 1명, 디자인·기획 담당 기자 1명), 인턴기자 1명이 일하고 있다.
플랫 ‘생일 카페’엔 김석종 사장, 김준기 편집국장도 방문해 5주년을 축하했다. 여성의 날이기도 했던 이날 김 사장은 장미꽃 50송이를 전달하기도 했다. 조직 내부에서 인식하는 플랫팀의 존재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남지원 경향신문 젠더데스크 겸 플랫팀장은 “사실 생일 카페가 열린 날은 예상치 못하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석방돼서 편집국이 난리가 났던 날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을 쪼개 방문하고 격려해줘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적어도 저희 조직에 플랫팀이 생산하는 젠더 영역 기사들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있다고 생각한다”며 “실제로 플랫팀은 유의미한 기획보도를 지속했다. 팀의 성격을 구분하자면 ‘우수한 기획팀’이 된 것 같은데, 회사 차원에서 별도 조직을 만들자고 결단한 게 유의미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거듭된 좌초 위기에 똘똘 뭉친 기자들
한국일보 젠더 전문 뉴스레터 ‘허스펙티브’는 숱한 중단·폐지 위기에도 기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4년째 이어지고 있는 콘텐츠다. 햇수로 5년차를 맞은 이 뉴스레터가 유지되기까지 여러 사연이 있다. 2021년 4월 처음 ‘허스토리’라는 이름으로 당시 콘텐츠 전략 부서 커넥트팀 소속 기자 2명이 담당하는 뉴스레터로 시작됐다. 뉴스레터 연재뿐만 아니라 당시 화제를 모았던 인터뷰 시리즈 및 독자 크라우딩 펀딩 ‘여자를 돕는 여자들’ 프로젝트도 진행됐다. 이후 회사는 기자 1인 랩 ‘허스펙티브랩장’(이혜미 기자)을 신설했고, 뉴스레터도 ‘허스펙티브’로 개편됐다. 하지만 개편 반년 만에 1인 랩은 없어지고 담당 기자는 취재 부서로 발령이 나며 폐지될 뻔 했다. 결국 기자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겨우 연재가 이어졌지만, 지난해 이 기자의 베이징 특파원 부임을 앞두고 또 다시 허스펙티브는 중단될 위기에 빠졌다.
보다 못한 한국일보 기자들이 뭉쳤다. 이혜미 기자 혼자 연재를 이어오던 허스펙티브가 지난해 10월부터 기자 4명이 집필에 참여하는 팀 체제로 확장된 이유다. 사회정책부, 사회부 등 서로 일하고 있는 부서도, 연차도 다르지만, “젠더 콘텐츠가 사라져선 안 된다”는 절박함은 같았다. 사회정책부에서 일하고 있는 최나실 기자는 “한국일보 ‘젠더 보도 최전선’ 같았던 허스펙티브가 중단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최은서 기자도 “지난해 이혜미 선배가 허스펙티브를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나실 선배가 저를, 또 제가 장수현 기자를 추천하며 이 팀이 꾸려졌다. 평소 마음으로만 응원하던 한국일보의 젠더 보도를 실질적으로 지지할 수 있겠다 싶어 동참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일보도 예외 없이 젠더 관련 영역의 부침이 반복된다. 담당 중인 ‘젠더살롱’이라는 연재 코너도 주기적으로 ‘오래 됐다’ ‘내용이 반복된다’ 등의 이유로 폐지 여부가 논의되곤 하는데 그 때마다 동료들과 힘을 모아 포맷이나 콘셉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필진으로 새 출발한 허스펙티브는 정치·경제·사회·국제·문화 등 “모든 세상살이를 여성·젠더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다. 최나실 기자는 “각자 맡는 분야가 국제, 법조, 정책 등으로 다양하고, 기수도 다르다 보니 시너지가 잘 나고 있다”며 “사회적 의견과 관점이 다양한 여성·젠더 의제를 다룰 때면 섬세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시선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필진들이 함께 크로스체크를 하고 의견을 보태며 만들어갈 수 있는 점도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경험 쌓이며 문제는 최소화, 성과는 꾸준히
2019년 5월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젠더데스크를 신설한 한겨레는 현재 5대 젠더데스크까지 이어졌다. 이듬해엔 편집국에 젠더데스크가 팀장을 겸임하는 젠더팀을 만들어 젠더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했다. 많게는 3명의 기자가 소속됐던 젠더팀이었는데 현재는 편집국 인력 수급 문제로 팀장과 기자 1명이 일하고 있다.
젠더데스크·젠더팀 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데 대해 신윤동욱 젠더데스크 겸 젠더팀장은 “지난 탄핵 광장에서도 봤듯 비동의강간죄, 차별금지법 등 젠더문제와 관련해 요구가 거세게 있었는데 우리의 역할이 계속 주어지고 있다고 본다. 젠더팀을 원래 만들었던 취지를 생각한다면 한겨레 같은 조직 분위기에서 담당 부서를 없앤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조직이 오랫동안 운영되며 여러 다양한 관점의 젠더 관련 기획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비상계엄 이후 광장에서의 목소리에 비해 여성 의제·공약이 실종됐던 이번 대선 국면에서 한겨레 젠더팀은 ‘새 정부에 바란다’ 시리즈 한 분야를 맡아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신윤 팀장은 “젠더데스크가 성평등 관점에서 봤을 때 적절치 않은 표현이나 주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지적하고 구성원도 문제를 빨리 수정하고, 이런 경험이 쌓이며 문제가 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n번방 사건 취재, 유력 인사의 성폭력 사건 등에 대해 빨리 관점을 찾아가는 분위기”라며 “피해자 입장에서 취재하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성과들을 계속 내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혼자가 아니다” 정보 공유에 심적 위안도
이들 언론사의 뉴스레터 말미엔 항상 독자들의 피드백이 달린다. 지지와 응원뿐만 아니라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진지한 생각을 남기곤 하는데, 기성 언론사 기사 댓글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최은서 기자는 “5년차를 맞은 것에 대한 큰 의미 중 하나는 5년 간 ‘여성주의적 빅데이터’가 쌓였다는 사실”이라며 “‘여가부 폐지’처럼 과거에 언급된 적 있는 여성 의제를 다뤄야 할 때면 꼭 예전의 ‘허스토리’ ‘허스펙티브’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다시 찾아보게 되는데, 현 상황을 덧대서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뉴스레터 독자들에 대해 “정보뿐만 아니라 심적 위안도 함께 얻으려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다. 특히 여성혐오 사건으로 괴로운 시기에는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저희 레터를 보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며 안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전했다.
여성·소수자 혐오 사건사고, 유력 정치인의 성차별 발언을 접하며 분노같은 막연한 감정이 들 때, 독자들은 플랫을 통해 “언어와 논리를 부여” 받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남지원 팀장은 “플랫팀의 업무는 경향신문의 젠더 관련 보도를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2030 여성 독자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재포장해 배포하고, 독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춰 자체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라며 “전자가 주요 젠더이슈를 팔로업할 수 있게 해준다면 후자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더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젠더는 갈등 사안 아닌 지향해야 할 가치”
신윤동욱 팀장은 한국 사회 성평등 문제를 두고 첩첩산중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실질적인 성평등은 별로 진전된 게 없어 보인다. 상징적으로 새 정부의 장관이나 주요 인사 구성을 봐도 30% 원칙이 예전보다 의제조차 되지 않았고, 성차별 임금, 온갖 여성 대상 폭력 문제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항상 거기서 멈춰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하며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도 오히려 강화되거나 노골화되는 국면이어서 때로는 허탈할 때도 있지만, 그런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려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얘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낀다”며 “계엄, 탄핵, 조기대선 같은 큰 국면이 이어지면서, 여성·성평등 의제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또다시 ‘해일 앞에서 조개 줍는다’는 비난이 가해지기도 했는데, 이때 허스펙티브는 오히려 이 국면들을 젠더 관점에서 해석하는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 ‘해일과 조개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했다. 꼭 뉴스레터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성·젠더·소수자·약자 콘텐츠가 늘어나면 좋겠다”고 했다.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