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 호명하지 않는 정부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정지혜 세계일보 외교안보부 기자.

단 일주일 동안 한국에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여성 3명이 살해되고, 1명은 중태에 빠졌다. 여러 차례 경찰에 스토킹과 폭행 신고를 했음에도, 접근금지 등 잠정조치가 이뤄졌음에도 여성들은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신고 후에도 여성들이 피살당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분명한 시스템 실패를 의미한다. 언론은 ‘피해자 보호명령’ 도입이 시급하다는 점, 22대 국회에서 스토킹처벌·방지 관련 법안 19건이 태평하게 계류 중인 점 등을 일제히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는 8월 국회에서 교제폭력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한 법 개정에 나선다고 1일 밝혔다.


교제폭력 대응 입법안은 기존 스토킹처벌법에 교제폭력을 추가해 개정하는 안, 특례법 제정 방식으로 교제폭력처벌법을 새로 만드는 안,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을 전부 개정해 교제폭력 등 친밀한 관계 폭력범죄를 포괄하는 안 등으로 나뉜다. 교제폭력을 겨누는 법적 근거 자체가 공백이기 때문에 이는 하루빨리 추진돼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단순히 교제폭력만 좁게 논하는 것으로는 여성살해(페미사이드),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이라는 더 중요한 본질을 놓치기 때문이다. 이는 친밀한 관계 내 여성 살해 관련 피해자가 2009년 93명에서 2024년 650명으로 늘었다는 통계로 드러나는 현실을 못 본 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33곳이 모인 ‘여성폭력 엄중 대응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일동’은 7월31일 대통령실 앞에서 여성살해 및 여성폭력 종합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은 “매일 이어지는 여성들의 죽음이 국가에 아무런 의미도 없느냐”고 지적했다.


적어도 지금 절실한 합의는 ‘남성에 의해 여성이 불균형적으로 큰 폭력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이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최우선적인 대응을 할 것이란 인상을 주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천명하지 않은 채 사법 대응 시스템을 내놓은들 실질적으로 얼마나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명백히 성별화된 범죄의 피·가해를 가리는 것이 ‘젠더 갈등’ 격화를 막는 길이라 여기는 수준으로는 정말 사태 해결을 원하는지 진정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이미 불신 가득한 여성들의 신뢰를 회복하기엔 역부족이다.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최고위급이 내는 메시지, 상징이 될 만한 파격적인 사법 판결 등이 분수령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아직 둘 다 전무한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주 수석보좌관회의 모두발언에서 “범죄가 예상되는데도 피해자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는 관계 당국의 무능하고 안이한 대처”를 질타했을 뿐 여성폭력의 심각성이란 맥락은 배제했다. 여성의 피해가 이렇게 심각해져도 ‘성별의 문제’로는 보지 않아 온 관행을 꿋꿋이 이어간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듯 해 아쉽다.


약 1년 전 영국 내무부는 극단적 여성혐오를 테러로 규정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는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20대 남성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데 이어 올봄 ‘여성 살인죄’를 신설하는 형법 초안을 승인했다. 이 나라들보다 한국은 확실히 한가해 보인다. 여성살해는 불운한 개인 문제로 취급하면서 여성의 출산은 전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모습에서 그 대비는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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