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이라 쓰고 '의견'으로 읽는다

[언론 다시보기] 양재규 변호사·언론중재위원회 조정본부장

양재규 변호사·언론중재위 조정본부장

최근 눈에 들어온 대법원 판결문이 하나 있다. 2023년 7월에 선고됐으니 2년이나 묵은 판결이다. 사건번호 2022다291320. 판결 선고 당시, 누가 이겼고 누가 졌다는 식의 결과만 다뤘을 뿐, 이유를 분석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다시 읽어보니, 의혹 보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언론에 주는 의미가 제법 크다.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검사가 전직 검사였던 변호사의 형사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게 소송이 걸린 기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개입 여부를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기자가 확인한 것이라고는 검사와 변호사가 수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통화와 문자메시지를 빈번하게 주고받았다는 정도였다. 수사와 무관한 일로 통화했을 수도 있고, 친밀한 사이여서 평소처럼 일상적인 근황을 교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는 두 사람의 유착을 의심했고 지인의 수사에 개입한 것 아니냐고 비리 의혹을 과감히 제기했다.


언론사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 결과가 2심에서 뒤집혔다. 항소심 법원은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빈번하게 통화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검사가 변호사 사건에 개입, 외압을 행사했다는 점을 선명하게 구분했고 이 중에서 두 번째 점을 허위사실로 보아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명했다. 대법원은 항소심 법원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안을 바라보았다.


먼저, 사안을 둘로 쪼개지 않고 한 덩어리로 보았다. 항소심 법원이 둘로 쪼갠 것은 의혹 제기의 근거 부분과 결과 부분이었다. 의혹 제기는 그 논리 구조상 결과 부분의 사실성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결과 부분마저 탄탄했다면 의혹 보도에서 그치지 않고 단정적인 논조로 보도했을 것이다. 대법원은 이 점에 주목, “제1사실(근거 부분)은 제2사실(결과 부분)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될 수 있으므로 이들을 임의로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진실성 또는 허위성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하지 않다”고 봤고 결국 의혹 제기의 근거 사실의 진위로 사안 전체의 진실성을 따졌다.


다음으로, 의혹 제기를 사실 적시가 아닌 의견 표명으로 봤다. 10년 전 한 젊은 판사는 의혹 제기란 사실의 조각들을 모아 분석하여 추론한 결론인데 이것을 ‘사실 적시’로 보는 게 맞냐며 ‘의견 표명’으로 보자는 제안을 했었다.(류영재 당시 춘천지방법원 판사가 2015년 11월20일 한국언론법학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이번 대법원판결과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주장이다. 이번에 대법원은 항소심 법원이 허위로 판단한 사항, 그러니까 검사가 변호사 사건에 개입, 외압을 행사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에 관해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 내지는 “비판하는 취지의 의견 표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의혹을 ‘의견’으로 보는 이 시각은 어떤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다. ‘의견’으로 보면 법적 책임으로부터 아주 멀어진다. 정정보도 청구도, 명예훼손에 기한 손해배상청구도 모두 문제 된 표현이 ‘사실’일 때 성립한다. ‘의견’이라면 책임을 묻기 어렵다. 보도 당사자로서는 당황스럽겠지만, 언론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의혹 보도를 바라보는 두 종류의 시각이 공통으로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 바로 의혹 제기의 결과 부분이 아닌, 근거 부분이다. 소송의 승패는 의혹 제기의 결과 부분이 아닌, 근거 부분에서 판가름 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번 판결이 제시하고 있는 일종의 언론 소송 가이드라인인데, 그 끝은 아마도 공적 영역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가 보다 자유로운 세상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이번 판결이 언론의 의혹 보도에 시사하는 실무적 지침을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본다. 일단, 의혹 제기의 근거로 제시된 사실들의 진위가 중요하다. 의혹 제기의 결과 부분은 의견이며, 추론의 결론이니 입증할 수도 없고, 입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의견의 진위란 있을 수 없다. 진위를 다툴 것은 의혹 제기의 근거 부분이다. 만일 허위사실을 근거로 의혹을 제기했다면 의혹 제기가 아무리 언론의 중요한 기능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의혹 제기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의혹 제기로 곤란을 겪게 된 당사자에게 손해배상이든, 정정보도든 피해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 의혹의 근거에 해당하는 사실관계를 꼼꼼히 검증해야 한다. 다음으로, 의혹 제기의 근거 부분과 결과 부분 사이의 연관성이 중요하다. 의혹 제기의 근거로 제시된 사실들이 진실이라 해도 결론과의 연관성이 떨어진다면 억지 주장에 가깝다. 인과관계까지는 아니어도 경험칙에 비춰 어느 정도의 논리적, 사회적 수준의 연관성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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