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범 KBS 사장이 TV수신료 인상을 재추진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하면서 인상안 근거, 추진 방식 등을 두고 내부가 술렁이고 있다. 뜬금없는 수신료 인상 방침에 대해 내부에선 박 사장 임기 보장을 위한 수단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박 사장은 23일 경영수지점검회의에서 하반기 경영 목표로 수신료 현실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3000원으로, 44년 만에, 500원 인상한다는 내용의 ‘3·4·5’ 슬로건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박 사장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거친 결과 가장 효율적 안으로 500원 인상안을 마련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공지능(AI)으로 만든 수신료 현실화 테마송도 이날 회의에서 공개됐다.
다음 날 곧바로 KBS는 수신료 인상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KBS는 24일 보도자료에서 “1981년 월 2500원으로 책정된 후 45년째 동결된 수신료를 합리적인 선에서 현실화하는 대책 마련에 나선다”고 했다.
KBS·EBS의 공적 재원인 수신료 조정안은 KBS 이사회 심의·의결과 방송통신위원회 의결을 거쳐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확정된다. KBS는 이른바 보수정부(2011년, 2013년)와 진보정부(2007년, 2021년)에서 두 번씩 수신료 인상을 시도했으나, 네 차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 들어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분리해 징수하게 되면서 KBS는 재정 위기를 맞닥뜨렸으나, 분리징수 시행 1년여 만인 올 4월17일 수신료 통합징수법(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10월부터 다시 통합징수로 돌아가게 됐다.
KBS 내부는 박 사장의 수신료 인상 방침에 황당하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자신이 임기 도중 교체되면 KBS 여러 과제가 무산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려는 의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 사장은 계엄 1주일 전 윤석열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또 수신료 500원 인상의 근거는 어디서 나온 건지, 무엇보다 KBS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큰 현시점에서 수신료 인상보다는 통합징수 안정화가 시급하다는 문제의식도 있다. 직전인 2021년 KBS는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3800원으로 조정하는 안을 제출한 바 있다.
수신료국 파견 중인 한 KBS 기자는 “박 사장 임기 보장을 위한 승부수라고 본다. 현시점에서 수신료 인상은 졸속 추진”이라며 “수신료 인상 추진 소식에 벌써 악성 민원이 늘고 있다. 우선 통합징수안이 시행되는 10월 말까지 제도 변화에 따른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노력하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박상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장은 “과거 양승동 사장 때는 수신료 인상 추진을 위해 공론화위원회, 국민 참여단 과정 등을 거쳐 수백 페이지 보고서를 만들어 인상안을 냈다”면서 “박 사장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500원 인상하기로 했다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인지, 이런 상황에서 선언적으로 발표 먼저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절차인지 굉장히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수신료에 대한 신뢰와 필요성을 설득하고 알려야 할 시기에 국민의 반감을 일으키는 선택을 하는 데 대해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KBS 한 이사도 “사전에 이사회에서 설명이나 보고, 논의가 전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적절한 추진 방식인지 의구심이 든다. 어떤 준비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불쑥 던질 수 있는 이슈는 아닌데 자칫 부정적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어 염려스럽다”며 “500원 인상에 대해 과연 적정한 것인지 검토가 얼마나 이뤄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KBS 관계자는 “수신료 인상 방침에 대해선 사장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500원 인상이 사내에 알려진 건 맞다. 하지만 500원이라도 올리면 좋겠다는 취지의 바람인 거고, 500원 인상안으로 정한 건 아니다. 구체적인 수신료 인상안은 계속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KBS는 24일 열린 시청자위원 전국대회에서 KBS 전국 19개 시청자위원회 명의로 수신료 현실화 등 재원 안정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공동선언문 채택도 끌어냈다. 개최 전부터 “박장범 쇼”라며 내부 비판이 상당했던 바로 그 행사에서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18일 ‘지금 수신료로 파티할 때입니까?’ 제하의 성명을 내어 “박장범 사장의 공치사와 일부 시청자위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신료를 쓰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KBS는 수신료 통합징수법 처리에 도움을 준 데 감사하다며 전국 시청자위원을 초청했는데, 시청자위원과 동행 1인까지 교통비, 출장뷔페, 선물 등이 제공돼 총 1억원이 든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KBS 시청자위원과 KBS 임직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열린음악회’ 특별 관람에 이어 공동선언문 발표, 캘리그라피 공연, 만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박장범 사장은 이날 행사 축사에서 “수신료가 얼마나 고마운지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면서 시청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고 국민만을 바라보며 공영방송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1년에 한 차례씩 반드시 전국 시청자 여러분들을 모시고 이런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이 와중 사측이 KBS 기자협회의 21대 대선 보도 평가를 위한 정례 보도편성위원회 개최 요구는 거부하면서 기자협회 등 사내 직능단체에 시청자대회 참석을 요청한 점도 논란이 됐다. 이에 23일 KBS 기자협회는 사측에 유감을 표하며 “기자협회는 행사 참석 대신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노사가 함께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는 걸 사측에 알린다”면서 “방송법과 이에 근거한 방송편성규약의 원칙을 준수하며 우리 보도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제고해 우리 사회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다수가 수신료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보도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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