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은 우연이 아니다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의 주인공은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었다. 총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작품은 작품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음악상, 무대디자인상까지 총 6관왕을 차지했다. 2016년 서울 대학로의 300석 소극장에서 시작된 뮤지컬이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무대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다. 언론은 “대학로의 기적”이란 찬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번 쾌거는 단순히 운에 기댄 ‘기적’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올해 미 토니상에서 6관왕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 장면. 한국 대학로 소극장에서 창작된 이 뮤지컬은 지난해 11월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해 흥행에 성공했다. 로봇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려낸 보편적 정서와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적 매력이 조화를 이뤘다는 평이다. /NHN링크 제공


이 작품은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됐다. 공모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선정하는 일회성 지원이 아닌 가능성 있는 창작진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방식이었다. 그해 하반기부터 텍스트 개발이 시작됐고, 2015년엔 시범 공연(트라이아웃)도 이뤄졌다. 동시에 영어 버전 작업도 병행되었기에, 2016년 미국 현지에서 낭독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을 이끄는 유명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즈와의 인연도 이 무렵 시작됐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가장 큰 강점은 ‘보편적인 정서’와 ‘한국적인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뮤지컬은 21세기 후반 서울을 배경으로 인간에게 버려진 헬퍼봇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 속 로봇들은 점차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관객은 이들을 통해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로봇의 유일한 친구가 한국어 이름인 ‘화분(Hwaboon)’으로 등장하고, 무대 곳곳에 한글이 활용되는 등 시각적 요소에서도 한국적 정서를 살렸다.


과거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한국 뮤지컬들은 한국의 역사와 맥락을 깊이 이해해야만 온전히 감상할 수 있거나, 반대로 한국적 색채가 지워진 채 외국 원작의 틀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어쩌면 해피엔딩’은 글로벌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분명한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지 관객의 취향과 감수성에 맞춘 정교한 각색 역시 영리했다. 한국 무대에서 큰 사랑을 받은 넘버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는 미국판에서 제외됐다. 애절한 발라드지만 절제된 감정을 선호하는 미국 관객에게는 다소 감정 과잉으로 느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로봇의 연애를 경쾌하게 그려낸 ‘Then I Can Let You Go’ 같은 넘버가 추가됐고, 전반적으로 올드 재즈풍의 브라스 편곡이 강화됐다.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어쩌면 해피엔딩’은 하나의 작품이 국제 무대에서 성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창작자 중심으로 이뤄진 긴 호흡의 개발, 다국어 버전 동시 작업, 세심한 각색과 편곡까지.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제작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중요한 건 제2의 ‘어쩌면 해피엔딩’이 나올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다. 창작자의 역량이나 운만으로는 해외 진출을 이루기 어렵다. 작품 개발부터 판권, 제작, 유통까지 이어지는 중장기 지원과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 편의 뮤지컬 성공을 넘어, 한국 뮤지컬 제작 시스템의 가능성을 증명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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