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자 TV 토론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폭력 묘사를 그대로 읽은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국회의원직 박탈 요구에 9일 기준 43만명 넘는 국민이 동의했다. 말 한마디에 수십만명이 들고 일어날 정도의 국민적 공분이다. 여기엔 이번 단건을 넘어, 그동안 정치인 이준석이 쌓아 올린 업보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이미 넘쳐흐르기 직전이던 물컵에 더해진 마지막 한 방울로 물이 쏟아져 내린 격이다.
컵에 물이 차오르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는 이번 사건이 주는 의미가 조금 더 복잡했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의 입에서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를 도구로 삼는 헌정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진 것의 충격은 물론 크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원의 이번 발언은 새삼 더 놀랄 것도 없을 만큼 전형적으로 그가 취할 법한 수법이었고, 우리 사회는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했을 뿐이라는 점에 이내 주목하게 된다. 즉, 이 복잡한 심경의 뿌리에는 여성혐오를 동력 삼는 정치인이 끝내 이런 짓까지 저지르도록 내버려둔 사회에 대한 분노가 더 컸던 것 같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면 그것대로 무능하고 부끄러운 일이며, 알고도 짐짓 흐린 눈을 하며 끝없이 마이크를 쥐여 준 것이라면 연대책임을 물어 마땅한 일이다.
분노하는 시민들은 이준석을 키운 8할이 언론이라고 성토한다. 일찌감치 그를 ‘청년 정치’의 아이콘으로 점찍고 기성 남성 권력을 물려줄 다음 세대로 여겨 온 주류 사회의 속셈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를 대대적으로 공표하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언론의 일이었다. 여기엔 진보도 보수도 가리지 않고 합세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진 뒤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이 의원에게 진보 매체들은 열렬히 환호했으며, “왜 진보 진영에는 이준석이 없느냐”고 한탄하기까지 했다. 이 의원에 대한 여성들의 비판이나 경고는 못 들은 척하면서 말이다.
보수 언론은 지금도 이 의원을 “미래 보수의 등대 역할”로 호명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괜히 “노년층과 젊은 여성의 반감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라고 점잖게 타이른다. 속 썩이는 아들을 열과 성을 다해 훈육하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어떻게든 계속 기회를 주고 싶다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기성 사회가 언제 청년 여성 정치인에게 이런 애착을 보여본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남성 사회가 이 의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이번 대선에서 20대 남성 37.2%가 그를 뽑았다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노년층이 퇴장한 뒤 지금의 10∼20대가 사회를 주도하게 될 때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이는 이 의원이 다른 성별과 세대에서 모두 외면받았다는 사실을 지속적이고 불균형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해롭고, 이준석을 반대하는 이들이 머리 싸매고 고심하는 그 암울한 미래에 대한 사회 지도층의 일관된 무심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크게 해롭다.
상식적인 시민의 눈높이에서 이 의원의 이번 발언은 분명 레드라인을 넘었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기 힘들다. 얼마나 최악인지 아직도 더 설명해야 하는 것이 비극이다. 하긴 20대 남성 3명 중 1명이 극우 성향을 보인다는 설문조사, 서울대 남학생 절반이 이준석 지지자라는 통계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또래 남성과 연애·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라는 사회가 아닌가. 청년 여성들에겐 대꾸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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