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불과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당선인이 될지 쏠리는 시선은 자연스럽지만 대의민주주의 아래 정치인이 단지 국민의 수단일 뿐이라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일 것이다. 다만 조기 대선과 잇따른 정치적 사건사고로 점철된 선거 국면은 ‘무엇’에 해당하는 정책, 공약, 어젠다 관련 논의를 밀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공동체의 미래, 비전을 살피는 대선 기획 등을 진행 중인 어떤 언론사들의 시도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세계일보는 4월22일부터 심층기획 <2025 대선 매니페스토-내일을 바꾸는 약속>을 연재 중이다. 13일자까지 매주 1회씩 총 4회에 걸쳐 20여개 기사를 선보였고, 앞으로 4회가 남았다. 유권자가 바라는 공약을 파악한 설문조사 결과로 시작해 경제분야, 인공지능, 기후‧에너지‧환경 분야 정책공약 검증,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 등을 하며 정통 선거 정책보도 방식을 고수했다. 특히 공약평가 외 정책선거를 위한 제도 개선을 정공으로 다룬 점이 돋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양대 정당의 미흡한 공약관리를 지적한 ‘3조원 예산 중 0.1%만…선관위 정책선거 ‘실종’’, ‘“역대 대통령 업적 계승” 외치면서…정당들도 선거 끝나면 공약방치’ 보도가 대표적이다.
3월 처음 필요성이 논의된 기획은 4월4일 대통령 파면 후 매니페스토취재팀(정치‧경제‧외교안보부 각 1명씩 차출) 공식 출범으로 본격 착수됐다. 설문조사는 한국정책학회 자문을 받아 질문지를 구성했고 선관위 검토 절차를 밟는 보이지 않는 과정을 수반했다. 조병욱 세계일보 기자는 “후보들 공약 발표 속도가 느려 평가 작업에 애로가 많았다. 역대 대선 공약 분석을 위한 자료수집 과정에선 체계적 자료가 없어 선관위 도서관을 뒤지고, 한문으로 된 공약을 데이터화 했다”고 전했다.
선거 국면 정책기사는 왜 중요할까. 그는 “여야 갈등처럼 화제성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선거 본질은 유권자와 정치인 간 약속이고 언론이 계속 조명해야 정치인도 중히 여길 거라 본다. 그런 보도가 늘면 정당과 후보의 정책 경쟁에 동기부여가 되고 이게 결국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길이라 믿는다”며 “2005년 국내 처음으로 매니페스토 개념을 도입해 정당의 공약 이행 여부를 점검한 보도를 하는 등 회사 전통이 토양이 됐다”고 말했다.
정책보도에 집중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언론의 관련 기획은 분명 이어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4월 말부터 학계‧현장의 전문가와 함께 전문‧선임기자 중심으로 <대선 공약 검증>을 진행하며 여성모병제, 인공지능(AI), 근로소득세 감세, 주4.5일제 등을 검증했다. KBS도 5일부터 개헌, 집무실 위치 등에 관한 <공약 검증>에 나섰다. SBS도 특집 페이지에 ‘공약이 알고 싶다’ 코너를 따로 마련, 후보‧분야별 공약 기사를 배치한 상태다. 뉴스1은 3040세대 교수와 전문가 릴레이 인터뷰 연재 <3040, 차기 정부에 바란다>를 28회차까지 진행했다.
역대 대선, 그리고 정부에서 늘 ‘문제는 경제’였다. 종합일간지, 방송사보다 이에 더 특화한 매체 성격에 기반해 경제지에서도 제언을 내고 있다. 4월 말부터 머니투데이는 경제부 기자 4인을 중심으로 “미뤄왔던 정책 과제를 이슈별로 살”피는 기획 을 내놨다. 앞서 상속세 관련 기획을 진행했는데 대선을 맞아 “시대 상황을 반영 못한 낡은 제도, 정책 개선”으로 확대한 성격이다. ‘기초연금’을 시작으로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거쳐 13일 ‘계속고용 의무’ 이슈를 다룬 게 현재다.
기획은 정책 근간인 예산과 시대상 변화를 병치하며 오랜 기간 논쟁적이던 제도 개선을 촉구한다. 숫자, 표, 그래프, 전문가 제언이 섞인 기사는 실상 일반 국민 삶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실제 ‘기초연금’을 다룬 회차엔 수백건 포털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기획 팀장 역할을 한 정현수 머니투데이 기자는 “정치적 해석으로 특정 후보 유‧불리를 말하는 반응도 있지만 사실 어느 후보가 되든 새 정부에서 중요한 사안들이다. 논의나 개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엇갈리며 깃발 드는 사람이 없는 주제들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선은 정책 방향이나 내용의 변곡점이 되기도 하는 만큼 정책 경쟁의 장에 화두를 던지고자 했다. 누가 될지가 제일 중요하겠지만 현시점 대선의 정책적 화두를 기록으로 남기고,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공약이 재계에 미칠 영향을 살핀 <대선, 산업지형 바꿀까>(비즈워치), <대선 공약 톺아보기>(전자신문) 기획 등도 경제 매체에서 나왔다. 더 좁은 분야지만 일반의 관심이 큰 부동산 정책 기사도 경제지 기획의 갈래에 놓인다. 비즈워치는 5월5일 처음 선보인 <집, 대선에 묻다> 기획을 통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히는 정책들로 시장에 혼란과 각종 부작용을 양산”해 온 부동산 정책 변화를 요구했다. 건설부동산부 기자 3인이 투입된 기획은 ‘공급정책’, ‘다주택자 규제’, ‘임대주거’, ‘지방미분양’, ‘세종 이전’을 다룬 5회차를 최근 완결했다.
김미리내 비즈워치 기자는 “부동산 정책에 역대 정권의 명운이 달린 일이 이어졌는데 사실 과거 공약을 되풀이하며 문제를 반복한 일이 많았다. 공급정책 면에서 ‘몇 백만 가구 공급’처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여기 맞추려 무리하게 진행된 게 대표적인데 정책이 완전히 나오지 않은 이 시점 시장을 살펴 정말 필요한지를 따져보며 가야 한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사 댓글의 공감을 보며 ‘이런 공약이 있다’고 쓰고 말 게 아니라 적절한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게 언론 역할이구나 새삼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이 시기 정책선거에 가장 진심으로 임하는 매체 부류 중 하나는 지역언론이다. 표심을 무기로 중앙 정치에 각 지역의 숙원사업을 어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기획 <6‧3 RE:빌딩>(경기일보), <부산 현안, 이번엔 반드시>(부산일보), <대선공약 긴급점검>(대전일보), <호남, 새 정부 길을 묻다>(남도일보) 등이 이런 맥락에 놓인다. 이런 흐름에서 인천일보는 7일부터 매립지, 경기 신공항, GTX, 신도시 재건축, 인천 아이피스힐 사업 등을 <6‧3 대선 이번만은 꼭!>으로 조명했고 16일까지 매일 연재한다.
인천과 수원 편집국 협의로 총 8개 어젠다를 다루는 기획은 평소 종합면이 별도로 나오는 인천‧경기판 1‧3면에 공통으로 배치되고 있다. 현안 해소를 위해선 파급력을 키울 필요가 있어서다. 1회 ‘매립지’ 의제를 보도한 이순민 인천일보 기자는 “이번에 제안된 의제들은 발굴됐다기보단 해묵은 현안에 가깝다. 중앙 정치권은 선거철이 아니고선 지역에 크게 관심이 없다. 대선, 총선에서 공약이 되면 이후에도 끌고 갈 동력, 명분이 되기 때문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매립지만 해도 환경부 정책 조정이 필요한데 대선이 아니고선 국가 정책적으로 풀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앙 정치권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며 국가 차원 의제나 정책방향 논의가 많이 없었는데 지역을 돌아볼 시간, 집중도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감이 큰 요즘”이라고 부연했다.
거대 양당 후보가 결정되고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하며 미약했던 정책 관련 기사는 늘어날 전망이다. ‘누구’가 정해지며 ‘무엇’에 초점을 맞출 여지가 생겼고,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도가 잡히며 공약을 비교할 수 있는 조건은 돼서다. 실제 국민의힘 후보가 결정된 이후 여러 주요 매체에서 정책‧공약 관련 기획을 시작한 모습이 보인다. 별개로 꼭 어젠다에 관한 논의가 아니더라도 선거 시즌은 언론사들의 콘텐츠나 서비스 관련 고민과 시도가 분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례로 MBC와 중앙일보는 참여자의 정치성향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진단할 수 있게 한 <정치혈액형>, <2025 정치성향 테스트> 서비스를 최근 각각 론칭했다. 경향신문은 12‧3 불법계엄 사태 이후 광장에 나오지 않았던 2030세대 100인을 인터뷰해 이들의 생각을 알리고 여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한 <언급되지 않는 청년 100인의 목소리> 디지털 기획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속 문제제기가 나온 여론조사 문제점을 극복하고 대선 판세를 전하려는 <여론M>(MBC), <메타J>(JTBC), <예측 6·3 대선>(한겨레) 서비스도 잇따라 오픈했다.
장나래 한겨레 정치부 기자는 “명태균 의혹 등으로 여론조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아졌고 한계도 인식하고 있지만 언론사 입장에선 보도를 안 하기 어렵다. 이슈 때마다 출렁이는 걸 추세라 보긴 어렵지만 여론조사엔 어떤 경향성이 확실히 있고 유권자들도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게 결국 민심일 텐데 그런 흐름을 읽어내려는 노력은 필요하단 차원에서 2020년 총선 때 했던 시도를 정치부에서 다시 해본 기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론조사 결과가 반응이 많은 기사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쏟아져서 뭘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는데 도움이 된다’는 피드백이 예상보다 많아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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