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안종필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었나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㉞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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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된 안종필은 13개월 옥고를 치렀다. 1979년 12월 석방 이후 안종필의 모습.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편집자 주]

안종필을 만난 것은 넘길 때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기자협회보를 통해서였다. 우연히 펼쳐본 1980년 2월25일자 신문에는 환자복 차림인 안종필의 사진과 함께 ‘간암과 투병중인 안종필씨’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는 이 기사가 실린 지 나흘 만에 타계했다.

안종필이 어떤 인물인지 탐구하고 싶었다. 안종필 자유언론상에서 ‘안종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안종필에 대해 들었지만, 정작 안종필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동아투위가 발행한 ‘동아투위자유언론운동17년사’와 ‘자유언론40년’, 동아일보 노동조합이 펴낸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는 안종필 평전을 시작하는 밑바탕이었다.

그 기록을 통해 안종필이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당시 차장급 기자로 드물게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했고, 이듬해 3월 강제축출 당시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었으며 유신체제 말기의 암담한 시절에 위원장을 맡아 동아투위를 이끌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해임되고 잡혀갈 거를 알면서도 흔연히 나선 그에게 빠져들었다. 어떤 자료에서 권근술이 생전에 안종필 평전을 쓰려고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선 안종필이라는 인물을 기록한다는 무게감의 의미를 되새겼고, 더더욱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취재는 크게 세 갈래로 이뤄졌다. 책과 자료들을 토대로 안종필의 일대기를 그려가고, 그와 인연을 맺은 20여명을 인터뷰하면서 빈틈을 채워나가고,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알려지지 않은 흔적들을 더듬었다. 그렇게 찾아가면서 어른거리던 안종필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산 보수동 골목쟁이 친구 최병학은 유년시절 남해안 탐험 무용담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줬고, 안종필의 경남고 1년 선배 김경희는 ‘경남중고동창회보’를 한 아름 가져와 보여주며 당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기억력이 비상하고 말솜씨가 청산유수 같아서 그와 안종필이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경남고 10회 동기들이 펴낸 졸업 50주년 기념집에서 안종필의 까까머리 고교 시절 흑백사진을 발견했을 때, 1962년과 1963년 부산일보 지면 PDF를 하나씩 넘기다가 1963년 2월9일자 1면에서 견습기자 최종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는 안종필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느낀 전율을 잊을 수 없다.

안종필의 고교시절 사진(왼쪽). 견습기자 최종합격자를 알린 부산일보 1963년 2월9일자 1면. ‘작년도 1차 합격자 안종필’의 이름이 보인다.

동아일보 해직 직후 경남고 동기 김용찬과 함께 의약품집 발간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보고 국회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수소문 끝에 안종필과 일했다는 신영호와 연락이 닿은 것도 행운이었다. 신영호를 인터뷰하며 1970년대 중반 을지로3가 인쇄골목 허름한 건물 3층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서 약학 관련 책을 교정 보던 안종필이 다가왔다. 해직 이후 2~3년간 공백이 조금은 채워졌다.

일련의 행적 추적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취재에 탄력이 붙었다. 2024년 4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법무부 서울지방교정청, 서울구치소, 동부구치소에 안종필의 수감생활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접견 기록, 가족, 친지, 동료 등과 주고받은 편지 기록, 수감 당시 반입한 책 목록, 외래 의사 왕진 등 진료기록 등이었다.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존재’ 회신을 해온 타 기관들과 달리 동부구치소는 ‘비공개’한다고 했다. 비공개라면 자료가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동부구치소 수용기록과에 문의했더니 가족이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자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100페이지에 달하는 접견기록과 서신기록 복사본을 확보했다. 교도관은 안종필이 면회자들과 나눈 대화를 일일이 받아 적었고,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를 먼저 뜯어보고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검열이었지만 46년 만에 찾아낸 기록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안종필의 감옥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1979년 11월 성동구치소에 수감중이던 안종필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기록 사본. 동부구치소(옛 성동구치소)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46년 전 안종필의 감옥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김성후 선임기자

옥중 편지 곳곳에 드러난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동아투위 동료들에 대한 뜨거운 동지애, 일주일에 한 번, 3분짜리 면회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만 반복하는 모습에서 그의 따뜻한 내면을 새삼스레 볼 수 있었다. 실직으로 비틀거리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소주잔을 나누고, 집에 돌아오면 ‘무정한 마음’을 노래하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던 소박한 사람, 안종필은 옥살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권도홍의 자전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 김종철의 ‘폭력의 자유’, 성유보의 ‘미완의 꿈’, 정연주의 ‘정연주의 기록’은 안종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아투위 동료들의 증언과 이광자, 안애숙, 안민영 등 가족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안종필 평전의 씨줄과 날줄이었다.

재작년 가을부터 취재를 시작해 작년 봄부터 한 편씩 글로 옮기다가 12월 긴 휴가를 내 집중적으로 썼다. 3분의 2쯤 써놓은 터라 올해 1월4일부터 매주 두 번 연재분을 올리면서 그때그때 보태거나 고치고 나머지 이야기를 채워나갔다. 주말이면 커피숍이나 도서관으로 가서 글쓰기와 씨름했다. 쓰다가 멈추고, 쓰고 멈추다가 이제 마지막 34회 연재분을 내놓는다.

재작년 10월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서 열린 합동추모제에 참석하고 안종필 묘역을 참배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에 맞춰 평전을 완성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이 글을 끝마치는 지금도 안종필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이후 안종필과 동료들은 동아투위 활동 상황과 성명서 등을 담은 ‘동아투위소식’을 매주 발간해 길거리에서 배포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아투위 유인물 ‘동아투위소식’이 없었다면 안종필 평전은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이후 안종필과 동료들은 동아투위 활동 상황과 성명서 등을 담은 ‘동아투위소식’을 매주 발간해 길거리에서 배포했다. 시대의 파노라마가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유인물에 펼쳐져 있었다. 안종필 평전을 쓰는 원동력이자 위안이었고,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 기록의 힘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안종필 평전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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