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에 1권씩 부부 공역·공저… 괜찮은 인생 아닐까요"

[인터뷰] 책 '22세기 민주주의' 공역한 서유진·이상현 기자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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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투표를 독려하는 구호가 여기저기 나붙는다. 당신의 한 표가 대한민국을 바꾼다느니 투표가 곧 우리의 주권이라느니 하는 내용들이다. 지극히 상식적이라면 상식적인 이 문구에 반기를 든 이가 있다. 바로 데이터 과학자인 나리타 유스케 교수다.

나리타 유스케 교수는 최근 저서 ‘22세기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중병을 앓고 있다며, 선거와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책 논점은 무수히 많고 각각의 논점에 대한 유권자의 생각과 지식의 깊이는 각양각색인데,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에서 특정 정치인과 정당에 맡겨버리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논리다. 저자의 발상은 알고리즘이 선거가 되고, 고양이가 정치인을 대체한다는 상상으로까지 과격하게 내닫는다.

부부인 서유진 중앙일보 기자(오른쪽)와 이상현 연합뉴스 기자는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인 '22세기 민주주의'를 최근 공동 번역했다. /서유진·이상현 기자 제공

이 책은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일본에서만 20만부가 팔렸다. 최근 번역돼 한국에도 출간됐는데, 부부인 서유진 중앙일보 기자와 이상현 연합뉴스 기자가 공동 번역을 했다. 서유진 기자는 “나카타 아츠히코라는 일본인 개그맨 겸 유튜버가 있는데, 이 사람이 운영하는 채널 중 신간 서적을 자기가 다 읽고 소개하는 코너가 재미있어 자주 봤다”며 “그 계정에서 나리타 유스케 교수의 책을 소개했는데, 신기하게도 남편과 제가 거의 동시에 ‘이런 책이 있는데 흥미롭다’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인연이 있는 출판사 대표님께 추천을 드렸고, 대표님이 저희를 믿고 맡겨주셔서 번역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두 기자는 2008년 입사 동기지만 7년간 출입처에서 만나지 못하다가 2015년 초, 한 저녁 자리에 동석한 인연으로 부부가 됐다. 문학과 영화, 외국어 배우기 등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했던 두 기자는 평소에도 조금씩 일본어를 공부했는데, 2019년 이상현 기자의 게이오대 연수가 계기가 되어 함께 일본에서 1년간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이번 번역 작업도 그 덕분에 절반씩 분담할 수 있었다.


이상현 기자는 “가장 첫 단계에선 절반씩 번역을 했고, 이후 서로의 번역을 감수했다”며 “그 다음에는 의미가 모호한 부분이나 적절한 단어를 골라야 하는 부분, 역자 주석 내용을 정리해야 하는 부분 등을 중심으로 도서관과 카페에 둘이 나란히 앉아 한 문장, 한 문장씩 작업했다. 처음에는 둘이 작업하니 혼자 할 때보다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둘 다 납득할 수 있는 표현, 문장을 찾기 위해 의논하는 시간이 짧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알고리즘이나 인공지능(AI) 용어 등 기술적 부분에 대한 번역이 쉽지 않았다. 두 기자는 최대한 정확하면서도 알기 쉽게 번역하기 위해 저자가 인용한 여러 논문과 책은 물론 영어 원문까지 일일이 찾아 한 번씩 재검토했다. 한편으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번역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일단 일을 마치고 육아에서도 퇴근한 다음에야 번역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유진 기자는 “매일 밤 아이를 재우고 밤 10시부터 새벽 1시 사이 작업을 했다”며 “분리수면 교육에 성공한 아이가 늦어도 10시30분 전에는 잠들어줘서 정말 고마웠다. 작업 막판엔 시부모님이 매주 주말 아이를 맡아주셔서 바짝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간 '22세기 민주주의' 표지.

번역 작업은 쉽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책은 흥미로웠다. 책은 중병에 걸린 민주주의를 재생하기 위해 △투쟁 △도주 △구상 등 세 가지 처방전을 제시한다. 이 범주 아래 정치인에게 장기 성과보수 연금을 줘야 한다거나 유권자 각각에 100표를 주고 나에게 소중한 정책엔 더 많은 표를 던질 수 있게 하는 유동 민주주의 방식 등이 소개된다. 민주주의란 결국 데이터의 변환이기에 선거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화와 반응들을 측정하고 이를 토대로 알고리즘이 의사결정을 하는, ‘무의식 데이터 민주주의’도 제안된다.


이상현 기자는 “무엇보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마주한 ‘병든 민주주의’란 시각 자체가 충격적이었다”며 “민주주의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인데,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지금의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우리가 치른 ‘피땀눈물’을 간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감도 있었는데, 읽어나가면서 저자의 주장이 그런 차원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두 기자는 지난달 29일, 책 출간을 기념해 지인들을 모아 작은 파티를 했다. 그날은 두 기자가 만난 지 3370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상현 기자는 그날 아내에게 “책을 정말 좋아하는 우리가 3370일 만에 처음으로 책 표지에 이름을 함께 올렸는데, 앞으로는 1000일에 1권 정도 공역이나 공저할 수 있으면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서유진 기자는 “번역이랑 출산이랑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또 공동 번역을 한다면 둘째를 낳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리라 생각한다”며 “단, 책은 내놓고 나면 자기가 알아서 책의 삶을 얻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리타 유스케 교수가 올해 내로 ‘22세기 자본주의’를 일본에서 출간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이 책이 잘 되면 그 책 또한 소개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널리 널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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