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받는 화해'와 예정된 결과

[이슈 인사이드 | 국제·외교] 권희진 MBC 기자

권희진 MBC 기자

취임 초부터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던 박근혜 정부는 2015년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까지도 위안부 문제에서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기도 전인 그해 12월 돌연, 피해자들조차 합의 내용을 몰라 졸속이라고 비판받는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원칙에서 타협으로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1년도 채 안 되는 그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과거사를 대하는 한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듯한 웬디 셔먼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의 발언이 있었다. 한일 관계의 책임이 마치 한국에 있다는 식의 충격적인 말이었다. 한미일 협력의 이익이 과거보다 중요하다는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의 발언도 나왔다. 중국이 부상하는 마당에 과거에 연연 말고 어서 일본과 손을 잡으라는 미국의 명확한 뜻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서둘렀던 위안부 합의가 그 의도와는 반대로 한일 관계를 오히려 경색시키는 역효과를 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를 계승한 윤석열 정부에서도 같은 경험을 다시 하고 있다. 강제징용의 피해자 측인 한국 정부가 오히려 화해에 적극적이고, 가해자는 뒷짐 지고 있는 상황은 당황스럽지만 익숙하다.


2차 대전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을 자주 비교하지만,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미국은 냉전 시기 유럽의 동쪽에서 소련에 맞서는 방파제 역할을 독일이 해주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라도 독일은 정상국가가 돼야 했고 그러려면 프랑스와 폴란드 같은 피해 국가들과 제대로 화해해야만 했다. 독일과 피해국들의 화해는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했다. 같은 전범 처지이지만 일본은 다르다. 미국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할 교두보 역할을 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비무장화하려던 일본을 한국전쟁을 계기로 재무장하기로 했다. 이런 미국의 정책은 일본의 전범들을 그대로 정계로 진출시키게 했다. 그러다 보니 도조 히데키 전범 내각의 일원인 아베 전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같은 정치인이 2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전후 일본의 체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자신들의 전쟁 범죄에 대해 정확한 반성을 할 현실적 필요를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2015년보다 중국의 힘이 더 커진 지금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 회복을 더욱 바랄 것이다. 지난 정부의 대미대일 관계를 비판하며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으로 제 3자인 국내 재단이 일본 전범 기업 대신 배상금을 내주는 안을 사실상 확정했다. 피해자 측은 전범 기업의 사과도 책임도 빠진 면죄부만 주는 행위라고 한국 정부를 비난했다. 피해자인 한국 국민과 정부가 서로 얼굴을 붉히는데, 정작 가해자인 일본은 뒷짐을 진 채 한국이 얼마나 성의를 보이는지 두고 보겠다는 태도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에도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인했고, 사과할 의도도 없다고 했다. 미국이 화해를 원하므로 미국을 봐서라도 일본과 서둘러 관계 회복을 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조급함을 그때도 지금도 일본은 잘 안다. 한일 관계의 중요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화해의 책임이 마치 피해자에게 쏠리는 듯한 모습으로 화해는 요원하다. 누군가로부터 ‘요구받은’ 화해를 위한 성급한 합의가 국내에서도, 한일관계에서도 결국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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