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군 '김군'의 비밀, 42년 만에 풀렸다

5·18 조사위 "사진 속 인물은 평범한 시민 차복환씨"
한국일보와 인터뷰서 "끝까지 싸우지 못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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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기자가 1980년 5월22일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촬영한 시민군 '김군' 차복환씨 모습. 이창성 촬영(5‧18기념재단)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기관총이 장착된 차량에 올라탄 채 카메라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이 사진 속 시민군. 5·18 때 이창성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촬영했던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인물은 2019년 개봉한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통해 ‘김군’으로 불렸다. 극우 논객 지만원씨는 5·18 당시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 1호’라고 지목하며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사진 속 주인공이 42년 만에 차복환씨로 확인됐다. 차씨는 1980년 5월 우연한 계기로 시민군에 합류했다가 광주 항쟁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가족이 받을 불이익을 우려해 지금까지 시민군 가담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차씨가 자신의 신원을 밝힌 계기는 영화 <김군> 때문이었다. 지난해 5월 우연히 TV에서 영화 <김군>을 본 배우자가 말해줘서 영화를 찾아봤고, 사진의 인물이 자신임을 확인했다. 그는 5·18기념재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당사자라고 알렸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지난해 10월 제보 내용을 이관받아 7개월에 걸쳐 검증 작업을 진행했다. 진상조사위는 지난 12일 대국민 보고회에서 “광수 1호로 지목된 시민군 김군이 차복환씨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12일 서울 중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회에서 5.18 당시 시민군 '김군' 차복환씨가 취재진을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진상조사위는 “제보자 차씨와 김군의 사진을 비교 분석하고, 사진을 촬영한 이창성 전 중앙일보 기자, 영화 ‘김군’의 강상우 감독, 차씨를 김군이라고 증언한 주모씨 등을 면담조사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차복환씨 단독 인터뷰…“이틀 만에 끝난 시민군 평생 죄책감으로”

한국일보는 13일치 2면에 ‘시민군’ 차복환씨를 인터뷰한 단독 기사(“끝까지 싸우지 못해 괴로웠는데 제가 광수 1호라니)를 냈다.

한국일보는 “차씨가 지난해 5월 처음 신분을 밝힌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반년간 차씨와 계속 접촉하면서 그가 정말 사진 속 시민군이 맞는지 탐문해왔다”면서 “진상조사위에서 차씨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정이 마무리된 이달 5일, 광주 모처에서 차씨를 만나 42년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차씨는 자신이 ‘김군’이란 사실을 지난해 5월 영화 <김군>을 본 아내가 말해줘서 알게 됐다고 했다. “아내가 영화를 보면서 ‘이것 좀 봐라. 꼭 당신 얼굴이다’라고 했는데 마침 장면이 전환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저 사람 눈이 당신 화났을 때 째려보는 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찾아봤더니 제 사진이 나오더라고요.”

2019년 개봉한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

차씨는 80년 당시 만 20세였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차씨는 석달 전쯤 광주에 와서 광주교대 인근 공장에서 상패를 만들어 군부대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광주엔 직업군인인 친형이 살고 있었는데, 차씨뿐 아니라 다른 동생들도 형님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차씨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시위 대열에 합류한 날을 5월21일로 기억했다. 집을 나섰는데 마침 시민군이 탄 군용트럭이 눈에 들어와 "나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또래들이 트럭에 타라고 해서 올라탔다"고 했다.

페퍼포그차(최루탄 발사 차량)에 올라탄 그의 모습은 5월22일 찍혔다. 그날 차씨는 군용 트럭을 타고 화순경찰서 앞 예비군 무기고로 가서 다른 시민군들과 무기를 탈취한 뒤 광주로 돌아왔다. 도청에서 군복과 군화를 받아 갈아입고 차량도 페퍼포그차로 갈아탔다. 차씨는 차량 상단 사수 자리에 섰다. 그는 차량에 설치된 자동 소총을 다룰 줄 몰랐고 소총 또한 기관총 탄띠를 걸쳐만 놓은 빈총이었다.

차씨는 사격 연습장에 있던 중학생쯤 돼보이는 어린 학생들 모습에서 집에 두고 온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총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급히 집으로 향했다. 형이 집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더는 시민군에 복귀하지 못했다고 했다. 차씨와 동생들은 2, 3일간 꼬박 집에 갇혀 있었다.

문이 열린 뒤 차씨가 향한 곳은 도청이었다. 그곳엔 시민군 시신이 든 관이 줄지어 있었다. “관이 세 줄씩 길게 놓였는데, 벌레가 끓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다리가 풀리더군요. 도청에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엄청 울었습니다.” 그렇게 5·18 민주화운동이 끝났다.

광주 항쟁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고 했다. 차씨는 죄책감에 과거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고, TV에서 5·18 관련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껐다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아내조차 남편이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복환씨를 단독 인터뷰한 한국일보 윤한슬 기자는 기사에서 “많은 이들에겐 권력 찬탈에 나선 신군부의 무도한 폭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민주 시민의 표상이었고, 누군가에겐 광주 시민군이 숨은 배후를 둔 무장 폭도라고 억측하기에 그럴싸한 증거였지만, 이 사진이 지난 42년간 5·18의 비극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대표적 상징물이었음은 분명하다…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사진 속 인물의 비밀은 40여 년 만에 이렇게 풀렸지만, 그 주인공은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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