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대선 정국에 등장한 '제3의 길'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브라질 언론에 내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제3의 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제3의 길’은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정권을 잡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지만, 현재 브라질에서는 좌파와 극우 후보로 양분된 대선 판도에 변화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심리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대선 정국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중도 진영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좌파 정권은 브라질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가 2016년 탄핵 당하면서 13년 만에 붕괴했다. 잇단 부패 스캔들과 경제 위기, 사회통합 실패가 원인으로 지적됐다. 이후 우파 과도 정부를 거쳐 2019년 극우 성향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으나 극우 정부는 너무나 빨리 실망감을 안겼다. 침체 후 반등이라는 경제의 기저 효과를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물가 급등과 실업자·빈곤층 증가를 방치하면서 서민들의 삶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코로나19 부실 대응과 거꾸로 가는 인권·환경 정책으로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키면서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부끄러운 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이런 배경에서 ‘제3의 길’이 언급되고 있지만, 민심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11월 초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좌파 룰라 전 대통령이 지지율 1위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비교적 큰 격차를 보이며 2위를 유지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가 치러지면 룰라는 어떤 후보를 상대해도 승리하고, 보우소나루는 어떤 후보를 만나도 패배할 것으로 분석됐다. 다른 주자들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룰라와 보우소나루 외에 대선 판도를 흔들만한 결정적인 인물이 없다는 얘기다.


‘제3의 길’이 완전히 실종된 것은 아니다. 권력형 부패 수사로 유명한 세르지우 모루 전 법무장관이 정계 진출을 선언하면서 변수로 떠올랐다. 모루 전 장관은 중도우파 정당에 입당하면서 ‘모두에게 공정한 브라질’을 모토로 내걸었다. 모루는 보우소나루와 대립각을 세우는 중도 진영 인사들과 우파 시민단체들을 끌어 안으면 대선 승리를 노려볼 만 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 전문가들도 모루가 본격적으로 대선 경쟁에 뛰어들면 룰라-보우소나루 양자 대결 구도를 어느 정도 허물 것으로 보고 있다.


모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연방판사 시절인 2014년 3월부터 권력형 부패 수사를 이끌어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다. 보우소나루 정부 출범과 함께 법무장관을 맡아 출세지향적인 기회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았으나, 자신의 지휘를 받는 연방경찰 업무에 보우소나루가 개입하자 대통령 직권남용이라고 비판하며 전격 사임해 강골 기질을 드러냈다. 이후에는 부패 수사 당시 룰라에 대한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 위해 검찰과 담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치권과 법조계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제3의 길’이 바람을 일으킨다면 룰라와 보우소나루가 어떤 승부수를 던질지도 주목된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룰라는 2002년 대선에서 섬유재벌 총수를 러닝메이트로 삼는 ‘신의 한 수’를 통해 승리를 거머쥔 경험이 있다. 내년 대선에서 그가 어떤 카드를 내밀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지지율이 추락한 보우소나루는 포퓰리즘에 기댈 가능성이 크다. 최근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액을 배 이상 올리겠다고 발표하면서 지지율을 소폭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뒀다. 국정과 시장을 팽개친 채 대선에만 몰두한다는 비판도 포퓰리즘을 노골화하는 그의 행태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무소속 상태인 보우소나루의 전략적 선택도 주요 관전 포인트다. 보우소나루는 2018년 대선에서 극우 사회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으나 이후 당 대표와 갈등을 빚다가 1년만에 탈당했다. 브라질 선거법은 무소속 대선 출마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보우소나루는 내년 4월까지 소속 정당을 결정해야 한다. 내년 대선은 10월2일 1차 투표, 여기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득표율 1∼2위 후보가 같은 달 30일 결선투표에서 승부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좌파와 극우로 갈린 대선 정국에서 조금씩 고개를 드는 ‘제3의 길’, 브라질 국민은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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