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와 '지푸라기'…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

2021 기자의 세상보기 당선작 (3)최기창 쿠키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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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가 실시한 ‘2021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전에 당선된 우수상 3편을 기자협회보 온라인에 싣는다. 1편 주동일 뉴스웨이 기자의 <시계에서 시대를 읽다-시계 담당 기자의 시계 수리 학습기>, 2편 김성호 파이낸셜뉴스 기자의 <자식 잃은 어머니는 어떻게 투사가 되는가>에 이어 3편 최기창 쿠키뉴스 기자의 <‘기레기’와 ‘지푸라기’…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다.

 

창신동 봉제공장 모습. 주택으로 보이지만 곳곳에 공장이 있다. 사진=창신숭인도시재생협동조합

 

“여기는 와보고 그런 글을 쓰는 겁니까?”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기사를 씁니까?”

항의전화는 숙명이다. 악플과 욕 메일 삭제도 일상이 됐다. 어느덧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연차가 되니 이제는 소송과 고발은 물론 협박도 견뎌야 한다. 그러나 마냥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사회적 약자들이 찾는 마지막 도구가 언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된 이후 ‘소수의 의견이라도 전달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침으로 삼았다. 그로 인해 처음으로 많은 양의 직접적인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올해 1월 정치부로 옮긴 뒤 처음으로 소화한 선거였던 ‘4.7 보궐선거’ 이야기다.

보궐선거 핵심으로 떠올랐던 ‘부동산’… 소수의 울분을 접하다

지난 4.7 보궐선거의 핵심은 ‘부동산’이었다. 원인은 ‘LH 사태’였다. 여기에 ‘내 집 마련’과 ‘집값’이 맞물렸다. 재개발‧재건축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집값 기대감 상승이 선거와 만났고 각 후보들은 부동산 현장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각 진영의 경선과 말싸움이 이어지던 지난 2월 창신동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한 기사를 작성했다. 창신동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장을 던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올해 가장 먼저 방문한 장소다. 당시 그는 창신동 이곳저곳을 다니며 재개발의 필요성을 강하게 언급했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언론을 통해 재개발을 외쳤다. 그의 입에서 나온 창신동은 매번 ‘낙후된 서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취재원을 통해 전해 들은 내용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재개발 찬성’과 대척점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재개발과 재건축을 옹호하는 입장만 전달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심지어 일부는 도시재생사업에 마냥 찬성하기는 힘들지만 이 지역의 가치를 단순하게만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적어도 이슈화된 재개발‧재건축과 맞물려 현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놀이터였던 ‘봉제공장’

사실 창신동의 상징과도 같은 ‘봉제공장’은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다. 숭신동과 흥인동 등지에서 외가 친척들이 과거 소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이 1~4호선 밖에 없던 시절 어머니는 그곳에 찾아가 가끔 일손을 돕고는 했다.

방과 후 혼자 마을버스와 1‧2호선을 타고 1시간 가까이 이동한 뒤에야 겨우 닿던 그곳은 놀이터였다. 초크, ㄱ자 모양의 자, 가위, 골무, 미싱 등은 장난감이었다. 등받이 없는 동그라미 회전의자로 버스 기사 흉내를 낸 적도 있다. 요금은 동그라미 금색 단추로 받았다. 실내 놀이가 지루해질 무렵이면 외삼촌을 졸라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 구경을 했다.

하지만 즐거웠던 추억보다는 혼난 기억이 더 많다. 매번 이모들에게 듣는 소리는 “먼지가 많이 날리니 오지 말라”였다. ‘유괴’에 관한 우려가 컸을 무렵이어서 “위험한데 왜 왔냐”는 핀잔도 자주 들었다. 다만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거의 매주 혼자서 그곳을 방문하곤 했다. 봉제공장과 거리는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곳이다.

굳이 개인적인 경험을 꼽지 않더라도 창신동은 인문학‧역사적 가치가 있는 큰 곳이다. 우선 서울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양도성 낙산구간’과 맞물려있다. 조금 더 걸으면 과거 일제 강점기에 조성한 폐채석장이 있다. 다소 뜬금없는 화강암 절벽이 그 흔적들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왔던 일명 ‘납득이 계단’의 모습. 배우 조정석씨가 키스를 묘사한 곳이다. 사진=최기창 기자

또한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부르짖었던 고 전태일 열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인 백남준의 기념관이 자리 잡은 곳도 창신동이다. 가장 최근에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으로도 사용됐다. 배우 조정석을 스타로 만들었던 ‘납득이’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양손을 비볐던 이른바 ‘납득이 계단’도 창신동에 있다. 결국 조선 시대부터 일제를 거쳐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피‧땀‧눈물‧웃음을 함께했던 장소다.

경제적인 부가가치도 상당하다. 창신동은 동대문시장과 가까워 패션 산업 생태계의 중심으로도 불린다. 가정집으로 보이지만 각종 의류 공정을 분업화한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 전문가는 2015년을 기준으로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소화되는 물량의 최소 1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금액으로만 최소 1500억원이다.

시끄러운 오토바이에게 응원을 받다

사실 도시 구조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경제 발전과 맞물려 도심‧부도심은 구도심이 된다. 이로 인해 일부 지역은 슬럼화가 큰 문제로 떠오른다. 재개발‧재건축에 관한 요구가 꾸준하게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창신동을 단순히 ‘재개발‧재건축’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판단하길 바랐다. 창신동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과거 수집해놨던 자료들을 부랴부랴 꺼냈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문가 의견도 받았다. 현지 주민들의 생각도 들었다. 관계 기관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자세한 자료도 받았다.

 

 

​창신동에 위치한 이음피움봉제역사관 모습. 봉제와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역사를 소개하는 장소다. 사진=한국내셔널트러스트

실제로 창신동은 봉제공장 장인들과 청년 디자이너를 연결하는 ‘창신 아지트’라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전국에서 남공‧여공이 몰려들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기회의 땅’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역시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다. 창신동은 근현대사의 ‘근로 역군’과 ‘현재를 사는 청년’이 함께 소통하는 장소다.

취재가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을 무렵이었다. 한 취재원은 “정말 기사를 쓸 것이냐”고 물어봤다.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는 매번 당해 괜찮은데 회사와 기자에게 피해가 갈 것 같다. 기사 안 써도 된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사는 데스크를 거쳐 출고됐다.

후폭풍은 상상 이상이었다. 회사 전화는 항의로 불이 났다. 내근 기자들에게 전해 들은 내용으로는 욕과 항의로 가득했다. 당연히 악플이 수많이 달렸다. 메일함도 욕으로 가득 찼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은 앞서 언급한 “이곳에 오기나 해봤냐”였다.

하필이면 어머니도 그 댓글을 보신 듯했다. 기사 출고 이후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따금 봉제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어머니는 기사를 보고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네가 어릴 때 봉제공장에서 놀았다는 걸 몰라. 기죽지 마라”고 다독여줬다.

물론 응원의 문자도 있었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항상 들리지 않았다고 했던 이들의 이야기였다. 특히 한 분은 “공정하게 기사. 를. 써 주셔서 감사하다 ㅡ새해 복많 이 받으시고...”로 시작하는 오타 가득한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겠다며 꾸역꾸역 버튼을 눌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에 문자를 다시 보고 울컥해 눈물이 고였다.

때마침 배달오토바이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어릴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따라 오토바이의 엔진소리가 유독 시끄럽지 않았다. 마치 외삼촌이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듯했다. 항의는 정치부 기자로서 숙명이라는 선배의 응원도 멘탈 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

물론 도시재생사업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재개발‧재건축을 마냥 반대하는 입장도 결코 아니다. 다만 모든 의견이 다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장소를 바라보는 사람은 많고 입장은 수만 가지다.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해졌고 선거도 무사히 마쳤다. 오히려 익숙해졌다. 이제는 조금 더 자신 있게 약자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가장 먼저 언급한 “이곳에는 와 본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네. 저는 봉제공장이 놀이터였습니다. 지금도 거의 매주 그곳을 걸어서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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