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사에는 어떤 '지문'이 남았나

나윤경 양평원장이 말하는 '기자의 시민적 의무'…"자신의 정체성 매일 성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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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사가 가진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매일 아침 기도하듯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래야 아주 좋은 기사가 아니라 ‘덜’ 왜곡된 기사가 나올 수 있다.”

‘객관성’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으로 설명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객관’(客觀)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

그런데 따져 보자. 성폭력 사건, 퀴어페스티벌 개최에 관한 논쟁, 하다못해 서울 부동산 문제나 교육 문제에 이르는 보도까지. 정말 기사는 ‘객관’적일까. 기사를 쓴 기자가 대졸 엘리트에, 서울에 거주하며, 남성이고 이성애자라면? 대상과 적당히 ‘거리두기’를 했다는 이유로 그 기사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의 과학철학자인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이를 ‘사소한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나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하딩을 인용해 “우리 언론이 ‘객관주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저널리즘에 요구되는 것은 이런 ‘사소한 객관성’이 아닌 ‘강한 객관성’이라고 강조했다.

 

나 원장은 8일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교육원 주최로 열린 저널리즘과 젠더 강연에서 “기자로서의 시민적 의무”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원장은 ‘강한 객관성’을 “자기가 가진 제약적 제한적 조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졸 엘리트에, 남성이고 이성애자라면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취재하고 기사를 쓸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라는 ‘제한적 조건’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에도 '지문'이 남는다

성범죄 사건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피해자 말을 어떻게 다 믿어요? 피해자 중심주의 너무 싫어요’ 이런 기자들이 있다. 피해자 말이 다 옳다, 선하다, 그러니 믿어라,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피해자 위치에 들어가 보면 질문도 달라진다.”

나 원장은 “자신의 계급적·인종적·성적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기자들에게 끊임없이, 매일매일 요구된다”면서 “내 기사에 남아 있는 나의 ‘사회적 지문’을 어떻게 다루고 성찰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위치성을 성찰하는 기자의 글과 그렇지 않은 기자의 글은 완전히 다르다. 내 기사는 기본적으로 왜곡이다, 인정하는 기자와 그렇지 않은 기자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왜곡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때론 어쩔 수 없이 속보 경쟁을 하더라도 나의 위치성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나는 ‘강한 객관성’을 가진 기자야, 이렇게 스스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강한 객관성은 소수자에 대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체화하는 것이고, 결국은 조직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나 원장은 말했다. 이를 위해선 조직의 다양성을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성'이 원칙되면 소수자도 허들 넘을 수 있다

그는 일단 “주52시간을 포함한 노동법을 강력히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은 중립적이지만, 여성 생애 과업(출산, 육아)과는 배치”되며, 기자들의 과도한 업무가 여성 기자들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판단에서다. 인재를 채용할 때는 물론 요직 인사 때에도 여전히 여성의 결혼·출산·육아가 변수로 작용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중심의 취재 환경도 마찬가지다. 술을 많이 먹고 인맥을 활용하는 네트워크 중심의 취재 환경이 여성 기자들을 ‘연성’ 부서에 잔류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나 원장은 “다양한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조건과 규정을 만들어야 소수의 사람들이 허들에 안 걸리고 들어올 수 있다”며 “다양성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초대 내각 구성. 한겨레 인터넷 1월20일자 보도 그래픽조 바이든 행정부 초대 내각 구성. 한겨레 인터넷 1월20일자 보도 그래픽

그러면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예로 들었다. 바이든 행정부 각료의 50%가 유색인종이며, 내각의 46%는 여성이다. 바로 직전 도널드 트럼프 정부 내각의 유색인종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이런 ‘다양성’에 대한 고민과 원칙들이 개인의 성찰을 요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인사평가시스템에서도 다양성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나 원장은 강조했다.

“과연 저널리즘이 지금 맹신하고 있는 객관주의를 벗어나서 강한 객관성을 탑재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쓴 기사에 내가 남긴 이 지문을 좀 더 옅게, 좀 더 소통 가능하게 남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기자들 각자가 갖고 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기자의 기사와 전혀 하지 않는 기자의 기사는 무척 다르다. 한국의 시민들은 끊임없이 성찰하는, 좋은 기사를 대할 자격 있는 시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민들과 같이 연대해서 저널리즘이 살아 있는, 강한 객관성을 탑재한 기사를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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