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떠난 디지털 인재들… "기자만 의사결정? 그러면 혁신 못해요"

비기자직으로서 수년간 맞닥뜨렸지만 한계 봉착…
언론사 디지털 전략의 문제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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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혁신적인 프레젠테이션 무대 뒷이야기를 조명한 영화 <스티브 잡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12년 만에 애플로 돌아온 잡스가 1998년 첫 번째 아이맥을 대중에게 공개하던 날. 그를 오래 취재해온 기자가 찾아와 말한다. “내가 당신 업계에 있을(지금까지 취재할) 줄은 몰랐어요. 워낙 빠르게 변하잖아요.” 영화 속 잡스는 이렇게 대꾸한다. “잘 버텨야죠. 언론사도 이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잡스의 대사처럼 언론계는 빠르게 변화했다. 디지털 물결이 거셌던 최근 5년은 그 어느 때보다 변화 폭이 컸다. 2014년 뉴욕타임스의 혁신보고서가 공개된 이후엔 ‘혁신’이란 말이 자주 언급됐다. 국내 언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디지털 혁신 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나름대로 잘 버텨온 시간이었다.



그 사이 디지털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했던 이들이 언론사를 떠나는 일도 잦았다. 올 초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서정호 전 YTN PLUS 크리에이티브제작팀장(현 청주대 교수), 한 언론사에서 3년간 디지털 서비스·콘텐츠 기획 업무를 하다 지금은 대형 IT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지훈씨(가명)도 그들 중 하나다.


디지털 노하우를 쌓은 이들의 이탈은 우리 언론계엔 뼈아픈 일이다. 지난달 청주와 판교에서 각각 서 교수와 지훈씨를 만나 언론사를 떠난 이유를 물었다. 기자직군이 아닌 두 사람이 수년간 디지털에서 일하며 마주한 문제점과 과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서정호 교수는 YTN 디지털 혁신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2013년 YTN이 상암 신사옥으로 이전할 당시 총괄아트디렉터를 맡아 ‘디지털 무적함대’라는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한 그는 지난 2월 회사를 떠날 때까지 디지털부문을 전담했다. YTN의 새로운 CI 제작, CMS와 제보시스템 구축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그가 올 초 청주대 조형예술학부 디지털미디어전공 전임교수로 임용돼 언론사를 떠났다. 오래 묵은 디지털 피로감과 개인적인 연구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디지털은 24시간 무한 반복되는 업무예요. 자의로 타의로 이 일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피로감이 컸던 것 같아요. 긴 시간 디지털을 담당한 분들은 다 비슷할 거예요. 특히 저는 제가 설계한 시스템 안에서 모든 일이 처리되니까 톱니바퀴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개인적인 연구도 하고 싶은데 회사 다니면서는 시간이 안 나더라고요. 언론사에서 경험한 성공을 교육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학교로 가게 됐죠.”(서정호)


김지훈씨가 지난해 언론사에 사표를 낸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대학시절부터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던 지훈씨는 국내 언론계가 디지털 인력을 대거 채용했던 2016년 한 언론사에 입사했다.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에 영향을 받은 언론사들이 디지털 실험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지훈씨는 “레거시미디어들이 디지털 혁신으로 향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나도 그 판에 껴서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업무는 주로 디지털 서비스·콘텐츠 기획이었다. 언론사에 몸담았던 3년을 되돌아보면 재미는 있었지만 “개인적인 성장은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열정을 쏟아부었던 프로젝트가 1년 만에 중단된 이후 이런 생각이 굳어졌고, 그길로 언론사를 나왔다. 몇 달 뒤 판교에 있는 IT기업으로 이직했다.

◇“기자만 의사결정하는 디지털조직에선 혁신 기대하기 힘들어”
지훈씨는 자신을 비롯한 디지털 인력에겐 ‘회사가 개인을 얼마나 성장시켜줄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요즘 ‘몸값’이 높고, 그에 따라 이직이 잦고, 개인의 포트폴리오가 중요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들에게 ‘내가 왜 언론사에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동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더구나 기자의 의사결정을 중심으로, 다른 직군은 기자를 지원하는 구조인 언론사 디지털 조직에선 이 문제를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인사배치 측면으로도 디지털에 잠깐 왔다가 취재부서로 돌아가는 기자들과 여기서 쭉 일하는 디지털전담 직군들 간의 인식 차이는 필연적이다.


“서로 업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데 결정권을 쥔 기자들은 커뮤니케이션 방식 자체가 ‘하라면 하는 식’이에요. 기자직군과 마찰을 겪거나 조직문화 자체에 답답함을 느껴 퇴사한 경우도 많아요. 기자가 아니면 태생적으로 주연이 될 수 없는 거죠. 이쪽 업계에선 ‘언론사는 별로’라는 소문이 퍼진 지도 오래예요.”(김지훈)


이런 상황은 언론사 전체의 디지털 혁신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지훈씨는 “기사를 디스플레이한다는 근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언론사에서 구현하는 기술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면서 “언론사가 매력적인 잡 포지션이 아닌 상황에서 이 일을 하는 동기가 없다면 계속 남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들에게 언론사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천장처럼 느껴지면 언론사로선 디지털 혁신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지훈씨는 개선안으로 ‘디지털 권한 분산’을 제시했다. 아직 언론사 조직문화에 젖어 들지 않은 젊은 기자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디지털전담 인력들에게도 능동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다.

◇디지털로 향하는 길은 거대한 피라미드 짓는 과정… 구성원 공감하는 공동의 목표 있어야
서 교수는 리더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디지털 리더는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이다. 부서 구성원들 간 갈등부터 직군별, 온·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그의 경험상 “정말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언론사가 디지털로 향하는 길을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는 과정’에 비유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10만명이 3개월을 교체주기로 20년간 움직여야 고대 피라미드 하나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언론사의 디지털화도 그만큼 쉽지 않다는 의미다. 수많은 인원이 오랜 시간에 걸쳐 ‘디지털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면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서 교수는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올리는 ‘캡스톤’과 중간 목표치이자 이정표를 뜻하는 ‘마일스톤’, 중심이 무너지지 않게 가운데에 넣는 ‘키스톤’이 언론사에도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서 교수는 “언론사마다 ‘시그니처 피라미드’를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그길로 가는 캡스톤, 마일스톤, 키스톤을 설계할 수 있는데, 그런 곳이 많지 않다”면서 “위에서 목표를 제시할 순 있어도 결국 실행은 조직 전체가 해야 한다. 리더가 먼저 작은 성과들을 보여주면서 가능성을 입증해야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지훈씨 역시 언론사가 디지털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공동의 목표 부재’를 꼽았다. 구성원들이 한목소리로 ‘우리의 디지털 목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언론사가 많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유의미한 결과에 다가가려면 ‘각 언론사만의 가치와 목표 설정→문제 발생→해결책’ 순서로 이뤄져야 하지만 현실에선 거꾸로 해결책부터 만들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언론사 디지털의 목표는 하루하루 트래픽 수치가 아니라 성공한 스타트업처럼, 긴 호흡으로 ‘제이커브’를 그리는 새로운 무언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일하는 IT업계는 하나의 기술을 연구하는 데 5년, 길게는 10년을 쓰기도 하거든요. 언론사도 디지털을 투자 개념으로 바라봐야 해요. 그 과정에서 얻은 값진 경험을 담당자 개인만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아카이빙하는 것도 중요하고요.”(김지훈)


서 교수는 언론사 구성원들이 ‘가상현실’이 더 이상 가상이 아닌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상반기 코로나19로 대학에서 비대면 강의가 이뤄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언론사도 디지털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론사 기자 조직이 안 바뀌듯 그동안 교수님들도 디지털에 친화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회환경적으로, 구조적으로 꼭 해야 하는 일이 되니까 해내시더라고요. 실시간 화상 수업, 목소리를 더빙한 PPT, 온라인 VOD 제작… 강의마다 혼자 하나의 디지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전국 4년제 대학 교수님이 8만명이 넘고 대부분 40~60대인데도 다 만들어냈어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전환이 일어난 거예요. 당연히 언론사도 가능하다고 봐요. 이런데도 디지털을 안 한다는 건, 말 그대로 그냥 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뿐이겠죠.”(서정호)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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