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피의자 검거, 그 뒤엔 기자들의 집념이 있었다

한겨레·국민일보, 이슈 계속 이끌어... 취재팀, 수집한 증거들 경찰에 제공
텔레그램 익명방 실체 첫 공론화한 대학생 '추적단 불꽃' 팀 도움 받아
취재 과정서 기자·가족 신상 노출, 신변위협 당하면서도 취재 이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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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잡힐 거로 생각했어요. 우리 보도의 목적이 걔(박사)를 잡는 거였으니까요.”(한겨레 24시팀 김완 기자)


“속보 뜨는 거 보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다 잡을 수 있겠다, 다 잡히겠다, 희망이 생겼어요.”(국민일보 특별취재팀 A 기자)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한 영상을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돈을 받고 유통해온 ‘박사’ 조모씨와 일당이 지난 17일 경찰에 붙잡혔다. 조씨 검거를 계기로 일명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 착취 세계의 실태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여론은 경악과 분노로 들끓었다. 지난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용의자 신상공개’ 청원은 6일 만에 250만 동의를 넘겼고,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청원에도 180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지난 23일에는 대통령이 직접 “n번방 회원 전원에 대한 조사”를 강조하며 신종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철저한 근절책 마련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SBS는 ‘8뉴스’에서 조씨의 신상을 공개했다. 경찰도 성폭력처벌법 위반 사례로는 처음으로 신상공개를 결정했다.


이 모든 일이 단 1주일 사이에 벌어졌다. 하지만 이는 ‘착시’일 뿐이다. 텔레그램 성 착취 세계는 이미 수개월 전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 지난해 9월 뉴스통신진흥회가 선정한 ‘제1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 우수상 수상작이 그 시초다. 미디어를 전공한 대학생 2명(‘추적단 불꽃’)은 잠입 취재를 통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온상이 된 텔레그램 익명 대화방의 실태를 최초로 폭로했다. 그리고 이것을 ‘n번방 사건’으로 호명하며 처음 공론화한 것은 한겨레였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라는 제하의 연속 기획으로 박사는 물론 n번방의 시초인 ‘갓갓’, ‘와치맨’ 등이 운영해온 비밀방의 실태부터 피해자와 실제 가담자 인터뷰, 텔레그램이 성범죄의 온상이 된 맥락과 이를 막을 대책까지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언론은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빅카인즈에 등록된 54개 주요 언론사 중 지난해 12월까지 이 n번방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는 한겨레가 유일했다. 그래도 취재팀은 낙담하지 않았다. 가해자를 잡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재훈 한겨레 24시팀장은 “기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많은 사건인 만큼 수사결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가해자들이) 모든 기록을 지우고 도망가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취재 단계부터 기록을 모두 확보해서 경찰과 수사 공조를 동시에 진행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텔레그램 내 성범죄 문제를 집중 보도했던 한겨레 24시팀에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최근 감사와 격려를 담은 서신을 전달했다. /한겨레 제공

▲지난해 11월 텔레그램 내 성범죄 문제를 집중 보도했던 한겨레 24시팀에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최근 감사와 격려를 담은 서신을 전달했다. /한겨레 제공

취재팀은 수집한 증거를 모두 경찰에 제공했고, 한편으로는 ‘추적단 불꽃’이 채증한 기록의 도움을 받아 취재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박사의 방을 비롯한 비밀방에서 기자의 신상과 아이들 사진이 노출되고 신변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박사 등이 피해자를 옥죄는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잡히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기자를 조롱했다. 김완 기자는 말했다. “그 방에 있는 이들도 자기가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면서도 이게 처벌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죠. ‘우릴 어떻게 잡겠어?’ 워낙 만연하고 흔한 일이니까요. 따라서 반드시 그들을 잡아서 처벌하는 경험, 전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끊어내야 해요.”


한겨레가 불을 지폈다면, 기름을 부은 것은 국민일보였다. 국민일보는 지난 9일부터 ‘n번방 추적기’를 연속 보도했다. ‘추적단 불꽃’과 함께 지난 6개월간 n번방을 잠입 취재한 기록이었다. 가해 상황을 “극히 일부”만 담고 잔인성을 “최소한도”로 표현했음에도 기사를 읽기 힘들 만큼 범행은 끔찍했다.


그래서일까. 반향은 컸지만,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특별취재팀 역시 고민이 많았다. A 기자는 “이 사람들(피해자)을 구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컸다”고 말했다. “계속 논의하며 얻은 결론은 100분의 1의 강도라도 범죄의 잔혹함과 교활함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거였어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를 누구 보다 바랐거든요. 다만 표현이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라는 비판은 충분히 알고 계속 고민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박사는 검거됐고 와치맨은 이미 구속 상태며, 갓갓도 검거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한겨레 보도 이후 여성들이 직접 ‘리셋’이란 단체를 만들어 디지털 성범죄 증거를 수집하고,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청원에서 사상 첫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낸 ‘텔레그램 디지털성범죄 해결’ 입법이 무산될 동안 국회와 언론은 무엇을 했는지, 묻고 답해야 한다.


김완 기자는 “언론도 이런 일을 사건으로만 소비해서는 안 되고 사회적 책임을 갖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우리 보도로 알려졌지만, 이 사건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당사자의 문제로 받아들인 많은 여성의 분노와 공포, 연대였다”고 지적했다. n번방 피해자들을 직접 취재해 온 오연서 한겨레 기자는 “검거는 끝이 아니고 기존 범죄 피해 영상이나 사진 등이 재유포되는 문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며 “힘들게 목소리를 내준 분들이 이제라도 적절한 피해 회복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취재하겠다”고 말했다. A 기자도 “가해자들이 사이버상에서 뭐라도 얻은 양 살던 세계가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것을 꼭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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