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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양 패싱’이 남긴 것

[스페셜리스트 | 스포츠]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2019.08.14 15:52:41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지난달 열린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에선 물 안 보다 물 밖 상황이 더 화제였다. 익히 알려진 ‘쑨양 패싱’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수영 스타 쑨양<사  진>이 약물 복용 및 도핑 검사 방해 논란에 휩싸이고도 버젓이 세계선수권에 나와 메달 따는 모습을 다른 나라 선수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일부는 쑨양과 시상대에 같이 서길 거부했고, 기자회견에서 “쑨양을 존중할 이유가 없다”고 공개 비판한 선수들이 숱했다. 돌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국제수영연맹(FINA)의 경고도 소용 없었다. 선수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말했다. 스포츠는 땀과 노력의 무게만큼 보상받는 세계이며,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훈훈한 장면도 있었다. 여자 접영 100m 메달리스트 세 명은 손바닥에 ‘리카코, 절대 포기하지마’라는 영어 문구를 나눠적고 카메라 앞에 섰다. 작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6관왕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다 올 초 급성 백혈병에 걸려 투병 중인 일본 선수 이케에 리카코를 응원하는 메시지였다.


편견을 이겨낸 포효도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흑인 선수 시몬 매뉴얼은 대회 초반 비난에 시달렸다. 혼성 혼계영 400m에서 그가 자유형 영자로 나섰다가 호주에 역전당해 미국이 2등을 한 까닭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자유형은 백인의 종목인데 흑인이 나서서 졌다”고 매뉴얼을 조롱했다. 그는 3년 전 리우 올림픽에서 자유형 100m를 우승한 흑인 여성 최초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다. 그런데도 여전히 ‘흑인은 수영을 잘 못한다’는 편견에 시달린다. 흑인은 땀구멍이 커서 부력(浮力)이 약하다는 둥 온갖 억측들이 소셜 미디어에 등장했다. 모두 근거없는 이야기들이다.


어쨌든 매뉴얼은 꾹 참고 대회 마지막날까지 역영했다. 흑인 최초 세계선수권 자유형 2연패(連覇)에 대회 4관왕에 오르고 나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실력을 여전히 의심하지만, 저는 잘 될 줄 알았어요. 훈련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이들은 좋고 싫음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심지어 쑨양조차 본인은 잘못이 없다며 기자들 앞에서 큰 소리쳤다. 각자가 각자의 변호사였다. 선배나 지도자의 지시에 무조건 순응할 것을 강요받고, 목소리를 내면 ‘튀는 놈’으로 찍혀 따돌림당하는 한국 체육계 분위기와는 너무나 달랐다.


운동 선수의 삶은 짧고, 인생은 구만리다. 한국의 엘리트 선수들은 은퇴 후 고달프게 사는 경우가 많다. 선수 생활하는 동안 정당과 부당에 대해 목소리 내는 법을 잊었기 때문은 아닐까. 역시 구만리 길을 걷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나를 돕는 동료이기보다 집요하게 태클거는 상대 수비수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마다 소리쳐 말해야한다. 옐로 카드 왜 안 나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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