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속 기자들, 그들이 파헤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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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서 고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 역할을 맡은 이희준(가운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87'에서 고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 역할을 맡은 이희준(가운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1987년 1월14일 박종철 고문치사와 그해 6월9일 연세대학교에서 경찰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열사 사건이 기본적 얼개인 영화 ‘1987’에는 용기 있는 젊은 기자 두 사람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와 작고한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다. 두 기자는 서슬이 시퍼렇던 권력의 언론 통제에 맞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기자들로 영화 속에서 형상화됐다.

 

언론 보도로 실체가 드러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 사건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전두환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일궈낸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무심코 던진 말 "경찰, 큰일 났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중앙일보 1월15일자 1.5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로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박종철 사건의 단초를 파악한 것은 이날 오전 9시50분쯤이었다.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서울형사지방법원을 거쳐 대검찰청으로 이어지는 ‘마와리’를 돌고 있던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4과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홍규 과장은 신 기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경찰, 큰일났어.”

 

6년째 법조를 출입하고 있던 신 기자는 이홍규 과장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 너무 기세등등했어요.”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이홍규 과장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려왔다. 그가 눈치챌까봐 양손으로 찻잔을 움켜쥐며 이렇게 답했다.

 

“아침에 경찰 출입하는 후배 기자에게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신 기자는 이 과장의 말에서 사건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사망했고, 사고 장소가 남영동(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숨진 학생의 이름과 학과, 학년 등 인적 사항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서둘러 이 과장의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방금 들은 몇 가지 사실들을 취재수첩에 적었다. 그는 검찰청 내 조용한 방으로 가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이 사망했는데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전화로 사회부에 보고했다.

 

신 기자는 곧바로 추가 취재에 들어갔다. 이진강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 최명부 서울지검 1차장검사를 거쳐 김재기 서울지검 공안부 학원담당 검사실에 들러 이름이 '박종ㅇ'이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의 취재에 서울대 출입하는 기자가 ‘박종ㅇ’의 이름은 ‘박종철’이며, 그의 집 주소가 부산시 청학동341의 31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박종철 사망 사건의 기사는 낮 12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중앙일보 1.5판(1판을 인쇄하다가 새 기사를 추가해 돌판으로 제작한 신문)사회면에 2단 기사로 실렸다.

 

1987년 1월15일, 중앙일보 7면에 첫 보도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15일, 중앙일보 7면에 첫 보도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학교 측은 박 군이 3~4일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박 군 집에는 박 군의 사망소식을 14일 부산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박정기 씨(57·청학양수장 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 있었다. 박 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 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군은 토성국교·영남중·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은 20만 원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편이다. -중앙일보 1987년 1월15일 7면.

 

박종철 사건 1보가 터지면서 국내 모든 언론사엔 비상이 걸렸다. 기자들은 곧바로 확인 취재에 들어갔다. AP와 APF 등 통신사들이 서울발 긴급기사로 중앙일보를 인용해 박종철의 죽음을 타전했다.

 

‘쇼크사’가 아닌 ‘고문치사’

 

그날 저녁인 15일 오후 6시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사망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왔다.

 

“밤 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고 쓰러졌다.”

 

경찰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쇼크사)라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철저하게 은폐했다. 또한 정부는 경찰의 공식 발표에 맞춰 이 사건을 사회면 2단 크기로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을 언론사에 전달했다.

 

하지만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축소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용기로 조금씩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동아일보 사회부장은 “대학생이 고문 받다 죽었는데 이런 보도지침이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며 보도지침이 적힌 칠판을 박박 지운다. 정권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상징적 장면이다.

 

1987년 1월16일자 동아일보 11면. 동아일보 제공

▲1987년 1월16일자 동아일보 11면. 동아일보 제공

동아일보는 1월16일자 <대학생 경찰조사 받다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박종철의 죽음은 ‘쇼크사’가 아니라 ‘고문치사’임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가 1월15일 밤 11시경 한양대 병원 앞에서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씨와 박종철의 누나 은숙씨가 나눈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으로 기초로 하고 있다.

 

부검에 입회한 박월길씨는 은숙씨에게 “종철이가 수십 군데 맞아서 피멍이 들어 있더라”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철이가 경찰에 맞아 죽었다”는 말도 했다. 황 기자는 박씨의 말을 듣고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심중을 굳혔다.

 

배우 이희준이 연기한 고 윤상삼 기자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가서 박종철을 응급조치한 중앙대부속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씨를 인터뷰해 물고문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윤 기자는 1월16일 오후 오씨를 용산병원 진료실에서 만났다. 윤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도 오씨는 30분 넘게 묵묵부답이었다. 윤 기자는 “대공분실에 갔다는데 거짓말을 할 겁니까. 의사의 양심을 걸고 솔직히 말해주세요.” 그리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동아일보’를 보여줬다. 신문을 두 번이나 꼼꼼히 읽고 난 그는 “다 나왔네요”라더니 대기 환자들과 간호사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뒤 입을 열었다.

 

그렇게 17일자에 오씨의 물고문 의심 증언이 사회면에 2단 크기로 실렸다.

 

....이에 앞서 14일 숨진 박 군의 시체를 대공수사2단 취조실에서 처음 검안한 중앙대부속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 씨(32)는 “14일 오전 11시45분경 박 군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오 씨의 말은 박 군의 사망 경위와 관련 경찰이 밝힌 “14일 오전 10시51분경 신문에 들어갔는데 신문 도중 박 군이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숨졌다”는 내용과 서로 엇갈렸다.

오 씨는 자신의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박 군은 조사실 간이침상 위에 반듯이 누운 채 3명가량의 수사관으로부터 입으로 하는 입대(對)입 인공호흡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의사 오 씨는 “도착 즉시 박 군을 검진한 결과 동공이 모두 열린 채 호흡과 맥박이 없었으며 변을 배설한 것으로 보아 항문도 열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는 여러 가지 징후가 명백히 나타나 있었다”고 말했다.

오 씨는 이 검안서에서 “외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사망시 등에 들리는 수포음(水泡音)이 전체적으로 들렸다”고 적었다.

오 씨는 또 검진 당시 수사관들이 “중요한 사람이나 꼭 살아야 한다” “살려 달라”는 말을 몇 차례 했고 사망선고를 한 뒤에도 병원으로 데려가 계속 치료해줄 것을 요구, 낮 12시40분경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사망이 이미 확인된 뒤여서 박 군의 시체는 중앙대용산병원 이송 5~10분쯤 뒤 경찰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오 씨는 “오전 11시 45분경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당시 박 군은 바지만 입은 채 웃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7년 1월17일 7면

 

“이 아비는 할 말이 없다이”

 

영화 속에서 고 윤상삼 기자가 박종철의 유골이 뿌려지는 장면을 취재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황열헌 기자가 동행했다.

 

황 기자는 1월16일 박종철의 사체를 태우는 벽제화장터에 가보기로 했다. 다른 기자들은 “기사도 안 나가는데 뭐 하러 가느냐”고 했지만 황 기자는 박종철의 사체를 태우는 벽제화장터와 박종철을 태운 재를 뿌리는 임진강 샛강을 취재해 ‘창(窓)-이 아비는 할 말이 없다이’를 1월17일자에 썼다.

 

1987년 1월17일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의 '창'.

▲1987년 1월17일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의 '창'.

 

15일 오후 6시경 서울 중구 황학동 경찰병원 영안실.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에서 교내시위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다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21·언어학과 3년)의 분향실이 마련된 이곳의 경비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기자들이 도착, 분향실로 들어가려 하자 건장한 체구의 경찰관들이 몸으로 막고 나섰다. 기자들이 분향실 안을 향해 “유가족 누구 없습니까”라고 소리치자 건장한 사내들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던 박 군의 누나 은숙 양(24)이 나섰다.

“13일 밤 철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하숙비를 좀 보내달라고…. 그런데 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박 양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런데…14일 저녁 낯선 남자가 찾아와 아부지를 데리고 상경한 뒤 오늘 아침 아부지한테서 염불책과 철이 사진을 가져오라는 전화가 왔잖아요.”

박 군의 누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 씨(57)가 실성한 모습으로 분향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요. 뭘 알고 싶소.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박 씨는 내뱉듯 외쳤다. 기자가 “아드님을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박 씨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라고 고함치르듯 말하고 고개를 떨군 뒤 박 양을 데리고 나갔다.

16일 오전 8시 25분 박 군의 사체는 영안실을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오전 9시10분 화장됐다.

두 시간여 화장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 박 씨는 박 군의 영정 앞에서 정신 나간 듯 혼잣말을 계속했고 어머니 정차순 씨(54)는 실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화장이 끝난 뒤 박 군의 유골은 분골실로 옮겨졌고 잠시 뒤 하얀 잿가루로 변해 박 군의 형 종부 씨(29)의 가슴에 안겨졌다.

종부 씨는 아무 말 없이 박 군의 유해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경찰이 마련한 검은 색 승용차에 올랐다. 잠시 후 일행은 화장장 근처의 임진강 지류에 도착했다.

아버지 박 씨는 아들의 유골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 가루를 한 줌 한 줌 쥐어 하염없이 샛강위로 뿌렸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씨는 가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박 씨는 끝으로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박 군의 유골 가루를 뿌린후 박 군의 아버지를 태운 승용차는 경찰병원에 들러 박 군의 부검을 지켜본 삼촌 월길 씨를 태우고 시내를 한동안 헤맨 뒤 치안본부 대공분실 마당 안으로 사라졌다. -동아일보 1987년 1월17일 6면

 

그리고 이한열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종창씨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종창씨가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영화 ‘1987’ 후반부는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해 6월9일 연세대 정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는 ‘6·10 국민대회(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이날 연세대생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시위 도중 이한열 열사는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당시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를 연세대생 이종창씨가 부축하고 있던 사진은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다. 이한열은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5일 21세의 나이로 숨졌다.

 

7월9일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의 인파가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추모 연설에서 26인의 열사들 이름을 부르짖는 연설을 했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000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이 기사는 「특종 1987-박종철과 한국 민주화(신성호 지음, 중앙북스)」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30년 만에 진실 밝히는 딥스로트들(황호택 지음, 블루엘리펀트)」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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