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기자들 "우리는 힌츠페터가 되지 못했습니다"

나경택·박화강 기자
광주 진실 세상에 알리려했지만
신군부 검열에 한 줄도 싣지 못해
지금도 기자역할 못했다는 부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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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누적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말고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최 기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보도통제로 사실보도를 못해 광주 시민들에게 조롱을 당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엄군의 만행을 담은 신문을 몰래 인쇄하려 노력하는 열혈 기자다.


최 기자는 김사복이라는 택시운전사, 위르겐 힌츠페터, 그리고 5·18이라는 당시의 상황이 실재하듯 실존하는 인물이다. 다만 어떤 한 명을 ‘롤 모델’로 삼았다기보다 당시 검열을 거부하고 투쟁했던 전남매일(현 광주일보) 기자들에 착안해 그려졌다. 당시 전남매일 기자였던 나경택 기자가 지난해 초 ‘택시운전사’ 제작진과 인터뷰를 하며 인물의 뼈대를 세웠다.


기자협회보는 지난 19일 광주에서 ‘최 기자들’을 만났다. 5월 광주의 현장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남긴 나경택 기자와 검열에 맞서 신문을 제작하려다 좌절 끝에 공동 사표를 주도한 박화강 기자를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마주했다.


▲5월 광주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긴 나경택 기자(오른쪽)와 검열에 맞서 신문을 제작하려다 좌절 끝에 공동 사표를 주도한 박화강 기자. 두 사람 뒤로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옛 전남도청 건물과 분수대가 보인다.

그들이 목격한 광주


“실제는 더 참혹했어요. 영화에서 나온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경택·박화강 기자는 당시 30대 초중반의 전남매일 기자였다. 1980년 5월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주화대성회부터 5월27일 광주항쟁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광주를 목격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일을 못하면 아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경찰까지 두드려 팼어요. 동구청 앞 관광호텔에서 그 모습을 목격했죠. 하물며 시민에게는 어땠겠습니까.”(박화강) “사진 찍는 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공수부대원들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죠. 5월21일엔 사진을 찍다 전남도청 앞까지 밀려난 공수부대 속에 휘말려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 때 한 통신병이 ‘발포명령이 떨어졌다’고 차 모 대위에게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직후 시민들에게 총알이 날아들었죠. 놀라서 도청 안에 들어가 다른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고 피신하고를 반복했습니다.”(나경택)  


광주 대부분의 기자들이 그랬듯 그들은 그 참상을 목격하고도 신문에 단 한 줄, 단 한 장의 사진도 싣지 못했다. 신군부의 검열 때문이었다. 5월19일 신문까지 광주 진상이 전혀 보도되지 않자 현장 기자들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분노한 박화강 기자는 오후 5시 전남매일 편집국 회의에서 주도적으로 20일자 신문의 검열 거부를 결의했다. 역사에 죄를 짓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당시 전남매일 기자들의 모습. 이들은 신군부의 검열에 반발해 검열 거부를 결의하고 신문을 제작한다.


“18일부터 20일 오전까지 있었던 상황을 모두 기사로 썼어요. 1면 머리기사를 제가 썼고 사회면 머리기사도 후배들이 썼습니다. 그런데 20일 오전 11시30분 부국장이 오더니 편집국 조판대가 엎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신문을 찍기 위해 활자를 다 뽑아서 만들었는데 임원들이 그대로 엎어버린 거죠. ‘택시운전사’에 나온 그 장면처럼요.”(박화강)


▲전남매일 기자들이 검열을 거부하고 제작한 1980년 5월20일 1면 머리기사. 그러나 20일 오전 임원들에 의해 보도가 무산된다.(박화강 기자 제공)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외국인 기자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총탄이 오고 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거시기’ 하는데 도대체가 현장에 있던 기자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는 박 기자는 신문을 계속 내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실보도와 비판을 하지 못하고 정부 발표 중심으로 나오는 신문은 더 이상 안 나오게 하는 것이 마지막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표를 썼다. ‘나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동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너도 나도 함께 그만두자는 말이 오갔다. 박 기자는 ‘나는’을 ‘우리는’으로 고쳐 칠판 가운데에 붙였다. 기자들이 다가와 한 마디씩 써 나갔다. 기자들은 공동 사표를 제출하고 2만장을 인쇄해 광주 시내에 뿌렸다. 사표는 반려됐지만 20일자에 4개 면 신문이 나온 뒤로 전남매일은 한동안 제작되지 못했다. “사표를 쓴 날 MBC광주방송국이 불에 탔습니다. 전남매일도 계속 신문을 제작했더라면 불에 탔을 거예요.”(나경택)


▲당시 광주 시내에 뿌려진 전남매일 기자들의 공동 사표.(박화강 기자 제공)


이들은 사표를 쓴 데서 그치지 않고 지하신문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신문을 찍어줄 인쇄소를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5월27일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행진을 계획했지만 그날 새벽 계엄군의 총칼에 광주가 진압되면서 그마저도 무산됐다.


모욕과 해직, 사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기자들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 6월 강원도에서 열린 소년체전에서 이들은 갖은 모욕을 받는다. “‘전라도 새끼들 때문에 이 더위에 소년체전 한다’고 그렇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광주 사람들을 폭도로 알더라고요. 언론을 차단하니 실상을 전혀 몰랐던 것이죠.”(나경택) “말을 안 하면 견딜 수가 없어서 노래 부르는 술집에 가면 노래는 안 부르고 ‘광주에 이런 일이 있었다, 광주 사람들 폭도 아니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박화강)


광주가 진압되자 해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편집국장은 8월6일 오후 5시, 지금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고 발표했다. 제일 먼저 불린 이름은 박화강이었다. “이 고통의 현장에 여러분들을 놔두고 편하게 살기 위해 나가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한 후 박 기자는 문을 닫고 나왔다. 동기인 손정연 기자는 “이게 무슨 인민재판”이냐며 뒤를 따랐다. 거리로 내몰린 기자들은 1~2년간 취업을 거부당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신군부는 해직으로 끝내지 않고 이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1990년 군국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공개했을 때 박화강 기자는 539번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나경택 기자 역시 사찰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그에게서 중요한 사진을 찾아내기 위해 보안대 중령은 5·18 직후 그를 찾아와 전두환 장군에게 광주 실정을 보고할 사진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중요한 필름은 이미 집 천장에 숨겨둔 뒤라 나머지 사진으로 자료를 만들었죠. 혹시라도 집이 수색 당할까봐 사진을 한 번 다 현상해놓고 그걸 친구에게 맡겼는데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때 당시 노무현·이해찬 의원이 제 사진을 들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친구가 넘겼고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 거죠.”(나경택)


▲'택시운전사' 스틸컷.


5·18 이후의 삶
그 곤욕을 치르고서도 그들은 아직도 5·18 주변부에서 맴돌고 있다. “직접 총을 들고 저항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있던 펜으로도 저항을 못했습니다. 아직도 5·18이 어떤 정신이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37년 전 참상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는 게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기자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에서 아마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박화강)


툭하면 왜곡되고 논쟁거리로 전락하는 5·18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역시 공존한다. “재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 등이 마련한 5·18 사진전 행사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독일 교포들은 5월 민중제를 매년 해오고 있더군요.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일부 세력이 5·18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나경택)


그 안타까움과 마음의 빚은 이들이 5·18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게끔 만들었다. 나경택 기자는 5·18 당시 찍은 사진으로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 21일부터는 5·18기념재단에서 ‘5·18, 위대한 유산 : 시민,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다’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를 열어 더 많은 이들이 5·18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박화강 기자는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불이(不二)학당’을 열었다. ‘불이’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나와 내 가족만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나라는 생각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박화강 기자는 “5·18의 부채감을 씻기 위해 죽을 때까지 남을 생각하며 불이 정신을 실천하고 살겠다”고 말했다.

▲전남매일 기자들이 1980년 5월21일부터 6월1일까지 휴간한 뒤 6월2일자 신문을 발행하고 망월동 구묘역을 찾아 5·18 영령들에게 잘못을 빌며 참배하는 모습.(나경택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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