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 사건에 시효는 없다

[그 기자의 '좋아요'] 도건협 대구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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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건협 대구MBC 기자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핍박받아 본 적이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평생 따라다니는 저주이자 주홍글씨다. 1990년대 말 경북 경산의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2005년 광복 60주년 특집 <대구현대사 재조명> 2부작으로 <1946년 10월, 항쟁의 도시>를 제작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의 유족을 여럿 만났다. 우리 주변에는 평생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질곡 많은 우리 현대사의 그림자이리라.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은 갑오농민전쟁, 3·1운동과 함께 우리 현대사의 3대 민중항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좌익이 선동한 폭동’이라는 시각때문에 아직 잃어버린 역사로 남아 있다. 뒤에 일어난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보다 규모가 더 컸지만 연구도 활발하지 않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도 부족하다.


10월항쟁 발생 70주년을 맞은 올해, 대구 출신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김상숙 선생이 ‘10월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속으로’를 펴냈다. 선생은 미군정의 공식 보고서와 기존 연구자료, 신문 기사 등 각종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 근무했던 경찰관, 시위 참여자 등 다양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항쟁의 시작과 전개, 민간인학살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그려냈다. 항쟁과 관련된 분들이 거의 고인이 된 만큼, 앞으로 더 이상의 책이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10월항쟁을 ‘미완의 시민혁명’이라 명명했다.


일제에서 해방되고도 친일파와 미군정에 주권을 빼앗겨 우리가 원하는 나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좌절과 분노에서 시작한 10월항쟁은 오랜 민주화투쟁 끝에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찾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분노와 탄식이 전국을 뒤덮은 한국의 현실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국가가 국민을 학살했는데 시효가 어딨습니까?” “아우슈비츠나 킬링필드는 기억하면서 가창골이나 코발트광산의 학살은 왜 기억 안하는지…”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인 채영희 여사의 말이다. 유족들의 바람처럼 10월항쟁 진상규명특별법이 반드시 통과돼 항쟁의 진상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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